[나의비망록] (148)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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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한진이 미군과 체결한 7백90만달러의 사업계약은 당시 국내업체가
월남에서 수주한 용역사업으로는 가장 큰 것이었다. 10년전 한진이 국내
에서 미8군과 처음 계약했던 7만달러 사업에 비하면 1백배가 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특히 다른 국내업체들이 미국업체의 하청을 받는 간접계약형식으로 월남에
진출한데 비해 한진은 주월미군사령부와 직접계약을 맺었다는 점에서도
특이한 일이었다.
한진이 월남에서 맡은 일은 퀴논항에서 앙케와플레이크까지 2백마일의
월남중부지역내에서 한국군 맹호사단과 2개 미군사단의 5만여병력에게
군수물자를 하역해 수송보급하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의 사업,더구나 해외에서의 사업은 현지 국민들뿐아니라
국가간의 외교적 문제까지 고려해 세심한데오도 신경을 써야했다.
미군당국과 계약을 맺은후 본격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면서 월남현지에 모인
인원은 2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사업초기에는 대략 7백명이었으니 3배가까이
늘어난 것이었다. 한진의 정규직원 2백명과 신문광고를 통해 모집한 기능공
근로자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중에는 전쟁터에서 한몫 크게 쥐어보겠다는 생각만으로 변변히 작업
능력도 갖추지 못한채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현장에서 기술을 가르치면서 안전제일을 강조했다. 숙소와 식당
뿐 아니라 작업장과 운전대 앞창에도 "나의 안전은 가족의 안전"이라는
표어를 써붙이도록 하는등 안전사고 방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과는 달리 차츰 직원들의 규율이 잡혀갔다. 품위를 잃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즉각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특히 월남주민들에게 폐를 끼치거나
탈선행위를 하지못하도록 엄중히 당부했다.
후에 한진그룹의 사훈으로 된 "창의와 신념,성의와 실천,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면서 민간외교를 한다는 자세로 국가의 명예를 지키고 한진의 신용을
쌓아갔다.
월남 현지인들에게도 기술교육을 시켜 고용하는 한편 난민구제와 대민
봉사에 나서게 했다. 월남에 대한 우방국민으로서의 역할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쟁기간 내내 미군과 현지인들로부터 "따이한
넘버원"이라는 칭찬도 듣게 됐다.
선박접안시설이 빈약해 늘 체화현상을 빚었던 퀴논항도 한진의 손길이
닿자 말끔히 정리됐다. 군수품을 실은 선박이 외항에서 기다리는 일이
없어졌다. 하역이 끝난 고가의 군수물자는 신속하고 안전하게 전선의 각
부대로 전달됐다.
당시 수송분야 책임을 맡고 있던 미군장성 한명이 한 말을 나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수송이 잘못돼 나중에 배상을 한다 하더라도 그 돈이 위급한 상황에서
필요한 탄약을 대신할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당시 전투상황이 그만큼
급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수송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월남전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당시 전쟁상황은 전선이 따로 없었다.
멀쩡한 후방에서도 폭파와 테러가 빈발했고 게릴라가 출몰했다. 이렇게
전선이 불분명한 전쟁터에서의 수송사업은 전투나 다름없었다.
베트콩의 기습공격으로 인명사고가 발생해 직원들이 공포에 떨때에는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접 수송차량의 선두에 서야 했던 일도
있었다. 퀴논항에 정박하고 있던 배위에서 잠을 자다 베트콩의 기습공격을
받고 급히 피신하는 도중에 발을 다친일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 일들이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월남전에서 한진의 활약상은 미국방부 수송박물관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수송도중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대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월남에서 수주한 용역사업으로는 가장 큰 것이었다. 10년전 한진이 국내
에서 미8군과 처음 계약했던 7만달러 사업에 비하면 1백배가 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특히 다른 국내업체들이 미국업체의 하청을 받는 간접계약형식으로 월남에
진출한데 비해 한진은 주월미군사령부와 직접계약을 맺었다는 점에서도
특이한 일이었다.
한진이 월남에서 맡은 일은 퀴논항에서 앙케와플레이크까지 2백마일의
월남중부지역내에서 한국군 맹호사단과 2개 미군사단의 5만여병력에게
군수물자를 하역해 수송보급하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의 사업,더구나 해외에서의 사업은 현지 국민들뿐아니라
국가간의 외교적 문제까지 고려해 세심한데오도 신경을 써야했다.
미군당국과 계약을 맺은후 본격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면서 월남현지에 모인
인원은 2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사업초기에는 대략 7백명이었으니 3배가까이
늘어난 것이었다. 한진의 정규직원 2백명과 신문광고를 통해 모집한 기능공
근로자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중에는 전쟁터에서 한몫 크게 쥐어보겠다는 생각만으로 변변히 작업
능력도 갖추지 못한채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현장에서 기술을 가르치면서 안전제일을 강조했다. 숙소와 식당
뿐 아니라 작업장과 운전대 앞창에도 "나의 안전은 가족의 안전"이라는
표어를 써붙이도록 하는등 안전사고 방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과는 달리 차츰 직원들의 규율이 잡혀갔다. 품위를 잃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즉각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특히 월남주민들에게 폐를 끼치거나
탈선행위를 하지못하도록 엄중히 당부했다.
후에 한진그룹의 사훈으로 된 "창의와 신념,성의와 실천,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면서 민간외교를 한다는 자세로 국가의 명예를 지키고 한진의 신용을
쌓아갔다.
월남 현지인들에게도 기술교육을 시켜 고용하는 한편 난민구제와 대민
봉사에 나서게 했다. 월남에 대한 우방국민으로서의 역할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쟁기간 내내 미군과 현지인들로부터 "따이한
넘버원"이라는 칭찬도 듣게 됐다.
선박접안시설이 빈약해 늘 체화현상을 빚었던 퀴논항도 한진의 손길이
닿자 말끔히 정리됐다. 군수품을 실은 선박이 외항에서 기다리는 일이
없어졌다. 하역이 끝난 고가의 군수물자는 신속하고 안전하게 전선의 각
부대로 전달됐다.
당시 수송분야 책임을 맡고 있던 미군장성 한명이 한 말을 나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수송이 잘못돼 나중에 배상을 한다 하더라도 그 돈이 위급한 상황에서
필요한 탄약을 대신할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당시 전투상황이 그만큼
급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수송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월남전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당시 전쟁상황은 전선이 따로 없었다.
멀쩡한 후방에서도 폭파와 테러가 빈발했고 게릴라가 출몰했다. 이렇게
전선이 불분명한 전쟁터에서의 수송사업은 전투나 다름없었다.
베트콩의 기습공격으로 인명사고가 발생해 직원들이 공포에 떨때에는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접 수송차량의 선두에 서야 했던 일도
있었다. 퀴논항에 정박하고 있던 배위에서 잠을 자다 베트콩의 기습공격을
받고 급히 피신하는 도중에 발을 다친일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 일들이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월남전에서 한진의 활약상은 미국방부 수송박물관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수송도중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대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