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상사가 국제화의 선두주자로 월남에서 외화획득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있던 60년대말 우리나라 경제도 1~2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
계획추진에 힘입어 서서히 성장기반을 구축해가고 있었다.

외형적인 면에서는 눈부신 속도로 성장하고 있지만 국제경쟁에서는 아직도
미약한 수준이었다.

69년에 나온 장기경제전망에서는 연평균 12%성장률을 기록한다고 할때
20년은 걸려야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리라고 예측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제와 상당히 엇비슷한 전망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민간기업체들은 그런대로 착실한 기반을 구축해나간
반면 정부에서 투자한 공공기업들은 대부분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국영기업이다보니 정부가 책정한 예산의 테두리에서 감독을 받으며 경영
해야 했기때문에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경영을 전개하는데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인재도 부족했으며 비전이 없고 관료적이라는 점도
문제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래서 정부는 가능하면 국영기업을 불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크고 작은 20여개의 국영기업체 가운데서도 두드러지게 적자경영으로
고전하고 있던데가 대한항공공사(국영KAL)였다. 기체고장등으로 결항과
연발착이 빈번했으며 공신력도 실추되어 있었다.

정부가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설립한 것은 62년이었다. 해방후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KNA)가 도산지경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우리
나라의 영세한 민간자본으로 막대한 자금이 뒷받침돼야 하는 항공사업 운영
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이렇게 설립된 항공공사를 다시 민간에 불하코자 정부가 구상하게 된것이다
국가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민간자본도 크게 성장해 항공산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게된 경영외적인 환경의 변화도 한가지 이유였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기는 경영상의 어려움이었다.

정부는 건전한 기업인에게 항공공사를 맡겨 정부지원하에 육성
발전시키기로 하고 경제계의 유력인사들에게 인수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당국이 접촉한 인사들은 하나같이 한국민간항공의 장래를 비관하고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았다. 대한국민항공사(KNA)나 항공공사의 발자취를
다들 너무나 잘알고 있는 터였다.

항공사업에 막대한 민자를 투입할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차라리 다른
사업을 하고 항공공사는 그대로 정부가 계속투자해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기업인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오히려 다른 국영기업체의 민영화에만 관심을 보여 해운공사나
대한통운등과 같은 일부 국영기업체에 대해서는 재계의 인수경쟁이
치열했다. 항공공사만은 어디서도 거둘떠 보지 않았고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정부는 외국항공사와 합작도 추진했으나 이해관계
상충으로 무산됐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아직 우리나라의 경제형편상 민간항공사업을 순수
민간자본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받아 들여졌던 것이다.

항공운송업의 특성상 미국을 제외하고는 프랑스나 독일 일본등 우리보다
앞선 나라들도 반관반민 형태거나 정부주도로 항공사업을 하고 있다.

민영화 문제를 놓고 정부가 고심하고 있는 이 시기에 나는 월남에 진출해
있던 인력을 수송하기 위해 1백20인승 중형비행기 슈퍼 컨스틀레이션 4발기
한대를 사들였다.

항공공사가 누적되는 적자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주2회 운항하던 서울~
타이베이~홍콩노선은 휴항중이어서 서울과 월남을 오가는 자체인력의
이동에도 불편이 컸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기존 항공공사에 대해 골치를 앓고 있을때였다. 추가
투자는 커녕 채무까지도 방임할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마침내 한진에서
항공공사를 인수하여 운영을 맡으면 어떻겠느냐는 뜻밖의 제안을 정부에서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