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하다보면 금전적인것에 연연하기 보다는 한차원 높여 손익의
개념을 뛰어넘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있다.

대한항공공사 인수문제가 바로 그런것이다. 당시로서는 사업상 손익계산
을 떠나야 가능한 문제였다. 다시말해서 기업가로서의 소명의식과 국익에
대한 봉사라는 사업의 철학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사업이든 정치든 나름대로 형성된 철학이 없을수 없다. 굳이 비유하자면
인간에게 있어서의 뼈나 마찬가지 이리라.

당시나는 해운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해상운송을 통해 미국이나
중국과 대규모 무역이나 수송업을 해보는 것이 포부였다. 이 사업을 위해
당시 장기영부총리의 요청도 있고해서 30억원정도의 투자계획을 세워놓고
인천항에 컨테이너 전용민자부두를 착공해 놓은 상태였다.

육해공 종합수송사업을 위해 해운사업을 먼저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 기회
를 보아가면서 천천히 항공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던 것인데, 부득이 사업
순서를 바꾸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렇게 작정을 한뒤 스스로도 민간항공을 고차적인 국가사업으로 발전
시켜야 할 시대적 요청과, 국가경제의 발전을 위해 경제 각 분야가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소신을 마음속으로 다졌다. 우선 나부터 신념을
가져야 중역들을 설득할수 있을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미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중역들의 반대는 퍽 완강했다. "항공공사의
인수는 막말로 우리가 월남에서 고생하며 모은 돈을 밑빠진 독에다 쏟아
붓는것이나 다름없다"는 항변이었다.

뿐만아니라 "우리정도의 내자 동원능력만 있으면 외국차관을 얼마든지
들여다 중화학공업 분야에 투자해 공장도 지을수 있는데 회생가망도 없는
항공사를 맡을 이유가 뭐냐"는 것이었다.

나로서도 이렇게 항공공사 인수를 반대하는 중역들의 이유가 백번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이들을 설득했다. 항공공사의 인수
는 국익과 공익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하나의 소명임을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 한진상사가 월남에서 번 돈은 국익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며,
육해공삼위일체를 이룬 수송기업의 구축은 나의 이상"이라고 고집했다.

물론 한진의 총수인 내가 일방적으로 결단을 내리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기업은 사람에 의해서 영위되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경험을 통한 철학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차원 높은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부측에 국영 대한항공공사 인수의사를 정식으로 통보한 것은 68년11월
1일이었다. 공교롭게 이날은 한진상사 창립 2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정부와 협의를 거쳐 납입자본금 15억원을 5년거치 10년 상환으로 하고,
항공공사의 누적적자 27억여원을 그대로 떠맡는 조건이었다.

이 인수조건은 큰 희생과 양보였다. 어떻게서든 납입자본금 만큼은 회수
하려는게 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 그러나 당시 액면가의 반 정도로 평가
되어 실제로 두차례의 공매에도 응찰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지나간 얘기지만 나는 이 5년간의 거치기간이 끝나는 날 불하대금 전액인
15억원을 일시에 상환했다. 박정희대통령의 요처에 의해 적자투성이의
국영항공사를 떠맡았지만 하소연하기 위해 대통령을 찾는일이 없도록 하자
고 하짐하고 사업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런 일은 없었다.

대한항공공사법이 아직 존속하고 있어서 나는 69년2월28일에 개최된 주주
총회에서 이사 선임 절차를 거쳐 사장에 취임하였다.

"주식회사 대한항공"의 창립일자를 3월1일로 잡고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어 3월6일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을 거행하였다.

지금부터 4반세기 전, "민족의 날개"라는 사명감과 자부심 하나로 실질적
인 민간항공사로서의 험준한 제일보를 내딛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