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공사 인수를 결정한 순간부터 나는 이 회사를 과연 국제적인
민간항공사로 발전시킬수 있겠느냐 하는 고민속에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인수시점에서 바라본 민간항공 사업의 발전전망이 그리
밝지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극동의 조그마한 분단국이라는 지정학적인 약점으로 인한 항로상의
제한을 감수해야 했다. 보유 항공기의 노후와 기술인력의 태부족으로 인한
국제경쟁력의 취약성도 안고있었다.

군조종사 출신이라도 민항조종사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다하려면 2년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경영상의 어려운점 외에도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들
까지 겹쳐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인수 첫해에는 현황파악과 부실내용을 밝혀내 경영을 합리화하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회사조직이 역피라미드형으로서 실무에 종사하는 하부구성원
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령권자가 더 많아 비효율적이며 비능률적인 구조라고
판단했다.

종업원 인수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국영기업체
였던 항공공사직원들이 과연 사기업에 적응할수 있겠느냐 하는 것도 문제
였다.

그동안 인사원칙을 무시하고 인맥에 의해 채용된 직원들이 반수이상이나
되는 것도 밝혀졌다. 인수 실무책임자는 부적격자를 선별하여 교체할 것을
나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20여년 사업을 이끌어 오면서 나는 "기업은 인간이 만들고 그
사람들로 구성되는 조직의 힘에 의해 육성 발전되는 것"이라는 내 나름의
체험 철학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기업은 곧 인간"이며 인화가 중요
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항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공기가 아니라 거기에 종사하는
종업원이므로 어떤 경로를 통하여 채용되었든 이미 항공사 업무에 대해서
최소한의 훈련이나마 쌓은 사람들의 경력은 그대로 인정하여 한사람의
이탈자도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쫓겨나면 본인의 망신이려니와 가족이 어려워지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면
자리를 바꿔주거나 교육을 시키면 된다는 얘기였다.

나의 이런 지시에 간부들도 놀라고 오히려 더욱 충성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들 사이에는 감원 소문이 멈추지 않아 사기가 저하되었다.

내가 공개석상에서 세번씩이나 감원이 없을 것이라는 점과 인화를
강조하니까 그제서야 믿기 시작했다. 결국 스스로 물러난 몇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을 받아들여 민항 대한항공의 닻을 올렸다.

나는 그동안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낮은 급료를 보완했으며 짧은
기간내에 영업을 정상궤도에 올려놓고자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이었던
인센티브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매일 일정한수 이상의 승객을 수송하게 되면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추가로
지급하는 방안이었다.

이무렵 세계의 선진항공사들은 대형 제트기로 수송체제를 갖추고 치열한
"하늘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새롭게 출범해야 하는
대한항공의 면모는 너무도 보잘것 없었다. 고작 8대의 보유기중에 그나마
유일한 제트기인 DC-9마저 도입한지 한달 남짓만에 엔진부분의 전기계통에
고장을 일으켜 일본에서 대수리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69년2월 정기주주총회 석상에서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함에 있어 기종의
증가는 프로펠러기가 아니라 성능좋은 4발 제트기로 하고싶은 마음 간절
하다"고 언급한바 있어서 나는 최신 기종의 도입에 전력을 기울였다.

다소 무리가 따른다 하더라도 대한항공이 살아남는 길은 짧은 시일내에
대량 수송체제를 갖추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선 국내선용으로 적합한
YS-11기 도입을 서둘러 2년동안에 총 8대를 도입하였다.

아울러 국제선 진출에 대비하여 중.장거리용 항공기도입도 함께 추진
하는등 기재의 현대화를 이루어가며 국제경쟁에 당당히 뛰어들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미래에 대한 투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