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이래로 인간이 사는 곳에는 폭력이 없어본 예가없다. 그래서 불교
에서는 폭력의 종식을 목표로 2,500여년동안 전인류를 향해 "자비의 실천"
을 강조해 왔다. 불자들에게 자비가 신심의 척도가 되는 것도 그것이 폭력을
극복하는 방편이자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폭력을 "무명업식"의 소산으로 설명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어두운 힘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교만 회의 고집 재물 지위 명예 쾌락을 위한 한없는 욕망,분노등 마음속에
내재돼 있던 이 어두운 힘이 표면화 행동화 된것을 폭력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폭력을 뜻하는 영어 "Violence"는 "Violate"(위배한다)"Violer"(유린한다)
에서 파생된 말이다. 결국 폭력이란 본래 제대로 있어야할 마음의 원칙을
유린한 것이요. 실상을 위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서양의 이 낱말이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폭력행위를 극복하는 방편은 자비가 될수 밖에
없다.

조선조말엽 도인으로 유명했던 김수월스님(1855~1927)은 만리이역 북간도
의 어느 고매 아래에 오막살이 한 채를 지어 놓고 매일 짚신을 삼으며 그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에게 짚신 한켤레와 점심을 보시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그러면서도 수월스님은 "누구"에게 "무엇"을 준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한절에 결코 오래 머물지 않고 구름처럼 떠다녔다. "무주처"
"무주상포시"를 실천했다. 입고 있는 누더기 한벌과 바릿대 하나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게는 아무 집착이나 미련이 없었다. 세속의 때가 묻어본
적이 없는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대중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마다 않았어도 큰절의 조실로 모시려고 하면 아예 그자리에 앉으려 들지도
않았다. 한국불교사를 더듬어 보면 밤하늘의 별처럼 또렷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이런 고승들이 많다.

조계종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연임을 놓고 며칠째 승려들간의 폭력
유혈충돌이 계속돼 조계사 경내가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다.

"한 불당에서 네사당 내사당"하는 스님들의 양태가 속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얼마전에 열반한 성철스님은 생전에 "종단의 분규는 의욕이 앞선 사람들의
''나 아니면 안된다''는 아집때문"이라고 질책하면서 수도자가 명리를 떠날
것을 늘 강조했다. 스님들이 "고를 떠나려는 욕심때문에 고를 더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더이상 없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