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미군정고문 과도정부의정관을 맡았던
서재필박사(1864~1951)는 그 일이 끝나자 자신을 대통령후보로 추대
하려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훌쩍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떠나기전 국민의 민주의식과 민주교육, 민주정치 파당싸움의
근절, 그리고 조국의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해방된 조국의 현실은 자신이 20세때 주도했던 갑신정변
(1884) 당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서박사는 얼마 안돼 6.25동족상잔의 소식을 들었고 51년
1월5일 조국이 한창전쟁중일때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병원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87년의 생애를 마쳤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서박사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미국
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다. 고국의 부모 처 형은 음독자살했고 두살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동생 재창은 체포돼 참형에 처해졌다.

32세에 조국을 떠났다가 12년만인 1895년 다시 조국에 돌아 왔을 때도
국내사정은 갑신정변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관민 모두가 아직
깨어나지 못한채 외세의존적 사대주의와 정쟁에 여념이 없었다.

서박사는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한국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서대문밖 모화관자리에 독립관을 세우고 영은문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등 맹렬한 활동을 벌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를 거울삼아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밑으로부터의 개혁
을 위해 국민계몽과 사회개혁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끝내는 수구파의 미움을 사 미국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시
추방되고 만다.

서재필박사는 혁명투사였다기 보다는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이성으로
우리에게 근대적 독립사상을 가르쳐준 스승이었으며 개혁을 실천했던
민족주의자요 민주주의 사상가였다.

그의 유해가 오늘 43년만에 조국에 돌아온다.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었던
친일파 스티븐슨 암살에 나섰던 전명운의사의 유해도 함께 돌아온다.

요즘의 국내외 정세나 세태를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한번쯤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

유해로 환국하는 독립운동가의 열정에 찬 민족정신 독립정신 민주정신을
되새기면서 이들이 염원했던 일들이 어느정도나 이루어졌는지를 반성
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