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정치.종교의 중심지였던 델포이에서는 제례기간중 3일째
오전에 시장이 열려 가축 의류 노예 금은제품등이 거래됐다. 이 곳을
엠포리움(시장)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을 다스리는 근거지로 삼은곳을 "신시"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신시는 제단, 혹은 제장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니 이미 단군
조선시대에 주민들이 제례를 올렸던 제단부근에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해 지는 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항상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들이다.

장도 보고 구경도 하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시장은 시끌벅쩍
해지게 마련이다. 거래는 관행과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자연히 혼란
스럽고 무질서해지게 된다. 시장을 "질서와 무질서의 공간"이라고 하는것도
그 때문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난장이라는것이 그런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런 혼돈은 서양의 바커스신의 세례(Orgy)와도 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에서는 장이 서고 다른 한편에서는 씨름 줄다리기 윷
남사당패놀이등이 펼쳐졌다. 그래서 난장판이라는 말도 생겼다.
서울근교의 송파장은 가장 큰 난전이었다. 조선후기에 탈춤의 연희장소로
알려진 곳은 주로 장터였다. 동래의 탈춤도 그렇고 고성 수영의
오광대가면극도 그 무대는 장터였다. 또 괴산장의 백중놀이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시장은 서민들의 삶이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기도 했다.
만남의장,사교의장이 되어 갖가지 정보가 그곳에서 교환됐다. 농민들이
불만을 해소했던 유쾌한 장소도 모두 장터였고 농민소요의 진원지 역시
장터일수밖에 없었다.
"임원경제지"에는 순조30년(1830)우리나라에 1,052개의 정기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집계돼있다. 그중 905개가 5일장이었다. 이것이 75년에는
1,085개로까지 오히려 늘었다가 81년에는 884개수,88년에는 725개로
줄어버렸다. 그 수는 매년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백화점 연쇄점
수퍼마켓 편의점등 대형유통기관에 밀려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다.
대구지역 재래시장들이 자체신용카드발급,향토특산물장터로의 전환,대규모
주차장건립등 활로모색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장구한
세월동안 이용해 오면서 서민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재래시장들이 다시 지역공동체의 원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