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찍기가 겁난다".

은행원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찍는 도장에는 "문제가 되면 책임진다"는 뜻이 담겨
있어서이다.

지난1일 자살한 전만일국민은행도곡동지점장도 결국 사기당한 10억원중
상당액을 물어내야 한다는게 부담이 됐을거란 추측이다.

대출이 문제가 되면 과실여부에 따라 담당자들이 변상해야한다. 그러다
보니 퇴직금을 찾지못하거나 집을 날리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일선 창구의 텔러까지 따진다면 은행원치고 자기돈을 물어넣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H은행 K대리(36).

그는 지난 91년 P지점으로 발령나자마자 자기돈 1백50만원을 물어내야
했다. 거래업체의 관세납부를 맡은 관세사의 사기에 보기좋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당시 관세사가 납부한 관세는 3백70만원.

은행들은 보통 세금을 받고 고객용 은행보관용 세관통보용등 3종류의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준다.

세금을 받은 창구여직원이나 K대리도 3백70만원을 받고 3가지 영수증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문제는 후에 발생했다.

세관에서 7백40만원의 관세가 납부됐다고 통보해 왔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관세사는 고객용영수증대신 세관통보용영수증양식을 2장 첨부해
세금을 냈다.

은행에선 돈을 3백70만원만 받았지만 세관에는 3백70만원식 두번낸것으로
계산된 것이다.

K대리는 이 문제를 본점에 보고할것인지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으나 결국
자비로 물어넣자는 결론을 내렸다. 본점에 보고할 경우 검사부의 검사에
시달려야한다.

검사결과는 잘해야 업무부주의로 인한 "주의촉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모자라는 돈도 결국 자신들이 부담하게 될것이란게 그동안의
경험이었다.

그래서 도장을 찍은 창구여직원과 자신 담당차장등이 분담했고 자신에게
는 1백50만원이 할당됐다.

S은행 Y지점에서 예금계텔러를 보고있는 C양(23)은 입행초기엔 업무시간
이 끝나는 오후4시30분이 가장 두려웠다고한다.

어찌된게 업무마감후 컴퓨터상의 잔액과 자신이 갖고있는 현금(시재)이
1주일에 3일꼴로 틀렸던 것이다. 1천-2천원 모자라는 날이 많았으나 어떤
날은 10만원정도까지 부족하기도 했다.

처음엔 각출해 모자라는 돈을 메워주던 동료들도 횟수가 잦아지자 모른척
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C양은 일단 실수를 최대한 줄이돼 모자라는 돈은
군소리없이 용돈에서 메꿔넣고 있다고 한다.

돈을 물어내는것은 다른 텔러들도 마찬가지이다.

베스트텔러들로 인정받고있는 직원들의 경우 평균 1달에 한번은 자기돈
으로 벌충하고 있다. K대리나 C양의 경우는 어떻게보면 사소로운 것일 수
있다.

상당부분 자신의 실수이고 실수에 대해 책임을 지는것은 어디서나 당연
하기 때문이다.

은행원들이 가장 큰 골치를 앓는 것은 대출이다.

지난92년에 정년퇴직한 O모씨(60)는 정년퇴직금의 절반정도밖에 손에
쥐지 못했다. 지점장시절인 지난88년 한 거래기업체에게 대출해준 것이
끝까지 말썽을 부려서였다.

그 기업체가 제공한 담보가치는 당시 3천만원정도. 요청한 대출금 7천
만원에서 4천만원이 모자랐다. 그러나 업체사장이 워낙 간곡히 사정하는k
데다 자신이 판단해도 사업전망이 좋아 대출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믿었던 그 업체는 연쇄도산의 파문으로 덜컥 부도를 내고 나앉아 버렸다.
결국 은행검사부로부터 엄밀한 검사를 받아 "중과실판정"과 함께
"부실대출금 전액변상"이란 통보를 받았다.

O씨는 편의상 대출금을 퇴직금으로 상계했고 당연히 퇴직때 퇴직금을 다
찾지 못했다.

이렇듯 은행원들은 대출이 문제가 되면 과실여부를 따져 "도장찍은 순서"
로 돈을 물어내는 것이 관례로 돼있다. 당장 현찰로 벌충하지못하면
퇴직금으로 상계하든지 해야한다.

그것도 모자라면 주택등에 대해 가압류처분을 당한다. 장영자사건에
휘말려 모든 재산을 가압류당한 김두한전신탁은행압구정동지점장이
대표적이다.

은행원은 돈을 만지는 직업이다. 맘만 먹으면 대출을 빙자, 고객돈을
유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은행들은 "부책규정"이나 "변상규정"등을
만들어 놓고있다.

"고의"나 "중과실"로 하자대출을 일으켰거나 계산착오로 손실을 끼쳤을
경우 개인에게 변상토록 하기 위해서다.

은행의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해도 은행원들은 이런 규정에 짓눌려있는게
사실이다. 신용대출이나 규정에 어긋나는 대출은 가급적 관여치 않으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도장날인 하나하나에 재산과 퇴직금을 저당잡히고 있어 "도장찍기가 겁
난다"는 은행원들.

전만일지점장의 죽음이 남의 일같지 않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