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국책연구소가 많다. 과학기술분야의 연구소가 27개, 인문
사회 계열의 연구소가 21개나 된다(부설연구소 포함). 이밖에 지방정부가
설립한 연구소도 있고 출연연구소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정부나
관련기관에서 운영하는 연구소도 많다. 대개가 80년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긴 것이다.

이들 연구소가 지금 통폐합의 도마위에 올라있다. 혹시나 신분상의 불이익
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해서 시험관을 흔들고 색을 뒤적이는 연구원들의
일손이 한결 불안하다. 어쩌다 연구기관이 또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는가.

개혁의 시대다. 보다 경쟁력을 갖도록 정부조직도 바꾸고 정부투자기관도
과감하게 민영화해야 한다. 그길로 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직개편
결과는 누가보아도 용두사미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제 개혁의 칼날이 힘없는
연구소를 겨누고 있는 것인가. 80년초에도 연구소의 대대적인 수술이
있었지만 실효는 없었다.

연구기관도 개혁의 흐름에서 비켜설 특권은 없다. 성역도 아니다. 경쟁과
생산성을 바탕으로한 민간사이드에서 보면 방만하고 창의성이 낮다. 어슷
비슷한 연구기관에서 비슷한 결과를 내놓고 있다. 또 각 부처마다 연구기관
을 만들어 부처이기주의의 제물로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따갑다. 실제
부처싸움의 대리전쟁을 연구기관끼리 치른적도 있다.

정부의 정책을 분석하고 제안하고 또한 평가하며 비판하여야할 연구기관이
관변으로 흘러 어용성 연구에 매달려 있다는 비판도 연구기관 당사자로서는
아픈 질책이다. 매년 실현성도 없는 그런그런 보고서나 만들며 무사안일에
흘러 "연구귀족"들의 안식처가 된곳도 있다. 그래서 어딘가 허물어져 있고
어딘가 나사가 허술하고 어딘가 타성에 젖어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역할은 나름대로 의의있고
보람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민간이나 대학의 연구기능이 나약했기 때문에
관에서 주도하는 국책연구기관이 그 역할을 키워왔던 것이다. 역할에 비해
이들 연구에 대한 투자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었다.

금년도 국책연구기관에 대한 정부 출연금이 통틀어 4,841억원인데 비해
미국의 벨연구소 예산은 2조4,000억원(30억달러)에 이른다. 어찌 비교가
되랴. 이처럼 적은 예산으로도 자연과학 연구기관들은 줄곧 우리나라 기술
개발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고 또한 사회과학분야의 연구기관도 그동안 정부
정책의 여과기능, 자료축적 기능, 정책개발 기능등을 수행해 왔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국책연구기관은 개발도상국의 훌륭한 모델로
인식되어 많은 후발 국가들이 유사한 국책연구기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연구기관을 지금 개혁의 걸림돌이라도 되듯이 통폐합 운운할 필요는
없다. 연구소들은 제각기 제몫을 하고있다. 차라리 연구소 개편의 방향은
보다 연구의 자율성을 살리고 서로간의 경쟁을 유도하여 질적 향상을 도모
하는 쪽으로 잡아야 한다. 연구소가 많아야 얼마나 많겠는가. 오히려 다양한
연구가 많은 기관에서 쏟아져 나와도 좋다. 아직도 이 사회는 전문가들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가진 고급인력들이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 연구비에 쓴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된다고 그것을
낭비라 할 것인가.

타율에 의한 개편보다는 연구결과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토대로 하여
자율적 정비를 유도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위해서는 예산책정도 프로젝트 중심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연구소는 일단 정원만 확보되면 자동적으로 소정의 예산을 확보할수 있었다.
따라서 연구소간의 경쟁은 질의 경쟁이 아니라 영역과 로비의 경쟁이었다.
이제부터는 지난 몇년간의 연구실적을 감안하여 제안된 프로젝트 중심으로
운영할수 있도록 예산을 배정하는 것이 어떨까.

그렇게 되면 경쟁력을 갖춰야 예산을 얻을수 있다. 당연히 시대에 적응해야
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질의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연구소도
문을 닫아야 한다. 이렇게 연구소간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면 연구효율성을
높일수 있다. 국책연구기관이 자립도를 강조하며 용역사업을 수행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마지막으로 연구원에 대한 처우개선을 건의하고 싶다. 최근 연구원에 대한
대우가 현저히 떨어져서 오래된 연구원들은 "옛날의 좋았던 시절"만을
반추하고 있다. 연구소만은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도록 연구원들의
의욕을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연구직의 이직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의 국책연구기관들은 외국에는 없는 나름대로의 두뇌집단으로 성장해
왔다. 아직까지 민간사이드의 연구기능은 약하다. 그래서 아직은 국책
연구기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떻든 밤늦게까지 연구소의 불빛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