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새벽 뭍에서는 보병이 총진격을 개시했고, 바다에서는 가이요마루가
북쪽 해안에 있는 에사시를 향해 항진해 갔다.

가이요마루는 네덜란드에 주문을 하여 건조된 것으로,인수해온지 이년도
채 안된 터이라, 일본에서 단연 으뜸가는 군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적으로도 굴지의 최신예함에 속했다. 이천팔백톤에 사백마력이었으며,
대포가 무려 이십육문이나 설치되어 있었다. 바다에 뜬 거대한 포대이며
요새라고 할수 있었다.

그런 막강한 화력의 군함이기 때문에 에노모토는 에사시의 패잔병 소탕에는
바다쪽에서는 가이요마루 한척으로도 충분하겠다 싶어서 다른 군함들은
후쿠야마에 머물러 있게 했던 것이다.

가이요마루의 함대 사령관실에서 둥근 유리창 밖으로 뭍쪽을 바라보고
있는 에노모토는 꽤나 감개가 무량했다. 그동안 막부가 문을 닫고, 동북
지방의 여러 번들이 차례차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암담한 심경이었는데,
이곳 홋카이도로 와서 비로소 일이 뜻대로 잘 풀려나가 이제 꿈의 실현도
눈앞에 다가온 듯하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이번 소탕전이 끝나면 곧 정권을
수립하여 독립을 선포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절로 뿌듯하게 부풀어
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후, 그런 장미빛 생각은 어디론지 날아가버리고, 에노모토는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있었다. 심한 풍랑에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에사시가 그다지 멀지않은 해상에서 였다. 차츰 수상해가던 천기가 그만
광란을 일으킨듯 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발까지 날리며 온통 바다가 출렁출렁
걷잡을수 없이 요동쳤다.

바다 위의 요새라고 할수 있었던 가이요마루도 자연의 위력앞에는 속수
무책으로 한낱 가랑잎에 불과했다. 휘몰아치는 설풍과 산더미처럼 솟구치는
파도에 이리 비틀 저리 기우뚱 마구 뒤흔들이며 몸부림을 쳐댔다.

"아- 맙소사. 천지신명이시어. 으으-이게 무슨 가혹한 형벌이십니까"

에노모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하고 이리 기울고
저리 쓰러지며 기도라고도 할수 없는 비명에 가까운 그런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군에 몸담아 바다 위에서 살다시피 해왔지만, 이처럼 엄청난
풍랑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무사할것 같지가 않았다.

"아-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럴 수가..."

만약 여기서 수장이라도 되는 날이면 그처럼 억울하고 분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에노모토는 절규와도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