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485) 제3부 정한론 : 서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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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 출신인 오쿠보는 자기네 번주인 시마즈다 다요시를 맡아 설득
했고, 조슈 출신인 기도는 역시 고향의 번주인 모우리가다치카를 설득
하여 먼저 판적봉환의 시범을 보이도록 했다.
설득을 당한 두 다이묘는 또 왕정복고를 앞장서서 지지했고 무진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도사와비젠의 번주를 끌어들여 네번이 함께 메이지
천황 앞으로 판적을 봉환한다는 문서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다른 번의 번주들도 이미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으니
거역할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모두 뒤를 따랐다. 그 판적봉환을 승인한다
는 그런 형식을 취하여 유신정부는 메이지천황의 이름으로 전국의 스물
네개에 달하는 번의 영주들을 지사로 임명했다. 번의 명칭은 그대로인 채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번주들은 메이지 신정부의 지사라는 관리가 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조정의 고관들이었던 공경과 번주였던 다이묘들을 모두
화족으로 분류하여 작위를 부여하였다. 그때 생겨난 일본의 귀족제도는
이차대전 말까지 지속되었다가 패전후 폐지되었다.
오무라는 번주의 지사 임명을 반대했다.
"번의 명칭을 변경하지도 않고, 번주였던 사람을 그대로 그곳의 지사로
임명하면 그게 무슨 개혁이 됩니까. 명칭만 지사로 바뀌었을 뿐이 아닙
니까. 그러니까 번이라는 명칭부터 바꾸고, 그곳에는 중앙정부로부터
관리를 보내어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옛 번주들이 그곳에 눌러앉아
있어도 안됩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것이니까요. 그들은 모조리
도쿄로 옮겨와서 살도록 조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
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오무라의 주장에 대하여 수뇌부에서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반반 정도였다. 찬성하는 측도 우선 그렇게 해놓고, 차차 기회를
보아 그런 식으로 고쳐나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개혁도 단계적으로 실행
해야지 처음부터 과격한 조치를 취하면 충격이 커서 어떤 부작용이 일어
날지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오무라의 의견은
너무 혁신적이라면서 아예 위험시하였다.
도쿄로 수도를 옮긴 넉달 뒤인 7월8일에 메이지신정부의 새로운 관제가
공포되었다. 이관육성이 그것이었다. 이관은 신기관과 태정관이었고,
육성은 민부성 병부성 대장성 형부성 궁내성 외무성 등이었다.
오무라는 병부성의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했고, 조슈 출신인 기도는 역시 고향의 번주인 모우리가다치카를 설득
하여 먼저 판적봉환의 시범을 보이도록 했다.
설득을 당한 두 다이묘는 또 왕정복고를 앞장서서 지지했고 무진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도사와비젠의 번주를 끌어들여 네번이 함께 메이지
천황 앞으로 판적을 봉환한다는 문서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다른 번의 번주들도 이미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으니
거역할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모두 뒤를 따랐다. 그 판적봉환을 승인한다
는 그런 형식을 취하여 유신정부는 메이지천황의 이름으로 전국의 스물
네개에 달하는 번의 영주들을 지사로 임명했다. 번의 명칭은 그대로인 채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번주들은 메이지 신정부의 지사라는 관리가 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조정의 고관들이었던 공경과 번주였던 다이묘들을 모두
화족으로 분류하여 작위를 부여하였다. 그때 생겨난 일본의 귀족제도는
이차대전 말까지 지속되었다가 패전후 폐지되었다.
오무라는 번주의 지사 임명을 반대했다.
"번의 명칭을 변경하지도 않고, 번주였던 사람을 그대로 그곳의 지사로
임명하면 그게 무슨 개혁이 됩니까. 명칭만 지사로 바뀌었을 뿐이 아닙
니까. 그러니까 번이라는 명칭부터 바꾸고, 그곳에는 중앙정부로부터
관리를 보내어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옛 번주들이 그곳에 눌러앉아
있어도 안됩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것이니까요. 그들은 모조리
도쿄로 옮겨와서 살도록 조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
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오무라의 주장에 대하여 수뇌부에서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반반 정도였다. 찬성하는 측도 우선 그렇게 해놓고, 차차 기회를
보아 그런 식으로 고쳐나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개혁도 단계적으로 실행
해야지 처음부터 과격한 조치를 취하면 충격이 커서 어떤 부작용이 일어
날지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오무라의 의견은
너무 혁신적이라면서 아예 위험시하였다.
도쿄로 수도를 옮긴 넉달 뒤인 7월8일에 메이지신정부의 새로운 관제가
공포되었다. 이관육성이 그것이었다. 이관은 신기관과 태정관이었고,
육성은 민부성 병부성 대장성 형부성 궁내성 외무성 등이었다.
오무라는 병부성의 대신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