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시장경제가 형성되면서 많은 기업인들이 나타났다. 신강성 최대
민간그룹인 신강공상업공사의 사장인 라비아 카데르부인도 그중 한명이다.

그러나 그녀만큼 특이한 경력을 소유한 기업인은 많지 않다. 카데르부인은
신강성 성도 우람치 출신의 가정주부로 경제불모지인 이 지역에서 거대
비즈니스왕국을 건설한 여장부이다.

중국내 소수민족인 위구르인이면서 이슬람교도인 그녀가 사업전선에
뛰어든 것은 중국이 경제개방정책을 채택하기 전인 77년이었다. 당시
그녀는 10달러의 총자산으로 시작,주로 목재나 위구르민족의 전통음식을
팔았다.

3년뒤인 지난 80년부터 그녀는 본격적인 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8번째
아이를 출산한 직후 가족의 만류를 무릅쓰고 상해를 출발점으로 중국
대도시를 순회하며 일종의 중개무역을 시작한 것이다.

카데르부인은 중동지역을 왕래하는 이슬람상인들로부터 물품을 구매,
중국 상인들에게 건네주면서 기반을 쌓아갔다. 섬유 의복 식품등이 주요
거래품목이었다. 그때만해도 그녀는 중국어를 한마디도 구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던중 지난 82년 우람치에 4평방미터 크기의 조그만 판매점을 차렸다.
특유의 친절함과 부지런함으로 카데르부인의 판매점은 번영을 거듭했고
몇년만에 1만평방미터 규모의 대형 쇼핑센터로 성장했다.

이곳은 신강공상업공사의 모태이자 카데르부인의 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밖에도 무역업 농업 제조업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때마침 불기 시작한 중국의 경제개방바람에 힘입어
사업은 순항을 계속할수 있었다.

카데르부인은 85년께부터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려 중국의 값싼 제품을
수출하며 막대한 부를 구축할수 있었다. 또 여기에 만족치않고 영국등
유럽국가로부터 신강성에 투자를 유치, 새로운 사업을 통해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는 "오늘이 있기까지 힘든 세월을 보내야했다"며 자신의 성공비결로
근면을 드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는 수개월간 제대로 잠도 자지못하는
등 자기와의 고된 싸움을 벌여야 했다고 회상한다.

주위에서 "철의 여인"이라 부를 정도로 카데르부인은 지치지않는 활동력을
발휘한 것이다. 또한 처음 대하는 고객에게도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
다시 찾아오게 만들었다. 친절한 서비스에 만족을 느낀 고객은 많은 다른
고객을 불러온다는 평범한 비즈니스 상식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데르부인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정치인
이라기 보다는 순수기업인이라고 소개할 만큼 정치에는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녀는 "오직 나 자신의 사업, 그리고 신강성 경제에 내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고 있다"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이같은 비정치적 성향은 위구르계 사람이라는 그녀의 출신성분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카데르부인의 성공은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가져왔다.

이슬람교에서는 아내가 집에서 가정을 꾸려가고 남편을 섬기는 것이 덕목
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카데르부인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가 할수 있는 것이라면 여자들도 해낼 수 있다"는
진취적 사고를 고수해왔다. 이것이 그녀가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성공을 일궈낼수 있는 정신적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카데르부인은 자신의 재산목록을 밝히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이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다. 대신 자녀들이 현대적인 첨단기술을 배워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기를 바라고 있다.

"사회에 기여할수있는 공부라면 무엇이든 뒷바라지할 생각이다. 나
자신은 그렇게 공부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으며 교육보다 값진 유산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영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