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신은 귀국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퇴짜를 맞은 것은 아니니, 유신정부의 수뇌들도 결과를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몇 달을 기다려도 조선국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듬해, 그러니까 1870년 9월에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정을 알아
보기 위해 다시 외무성의 관리 두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다. 전번에 갔던
모리야마와 요시오카히로키였다.

정현덕은 이번에는 그들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왜학훈도인 안동준을
시켜 앞으로의 모든 교섭은 대마도의 소오요시다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통보했다.

외무성에서 보낸 사신은 만나지 않겠으니, 전례대로 대마도를 통해서
구서식을 가지고 교섭을 하자는 것은 일본의 신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곧 국교 회복 불가를 간접적으로 알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국교를 회복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아무 성과 없이 돌아온 두 사신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유신정부의
수뇌들은 전번보다 오리려 더 불쾌한 소식이어서 즉시 대책을 협의하였다.

전번에는 국서의 수정을 요구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신정부의 출범을 인정
하지 않는 듯한 통고가 아닌가.

회의는 처음부터 격앙된 분위기 속에 정한론이 지배적인 논조를 이루었다.
이다가키다이즈케는 조선국 정벌을 즉시 단행해야 된다고 이번에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의 국서에 대하여 두 차례나 모독을 가했는데 그냥 참고 넘길수가
있겠냐고 핏대를 세웠다.

소에지마다네오미, 에도신페이, 고도쇼지로 등이 적극 찬동했다.

팔짱을 끼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사이고는, "내가 사신으로 갔다 오겠소"
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에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이고는 자기가 가서 직접 흥선대원군과 단판을 벌이겠다고 역설했다.

그래야 국교를 회복할 수가 있지, 당장 무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성급하다는
것이었다.

사이고의 제안에 고래를 내저은 것은 오쿠보였다. 어디까지나 오쿠보는
신중론쪽 이었다.

"조선국과 국교 회복을 서둘 이유가 없어요. 그건 나중으로 미루어도 아무
상관 없고, 지금 우리에게 요긴한 과제는..."

하고 자기의 소신인 대양이, 즉 부국강병론을 늘어 놓았다.

두 사람의 논쟁은 결론 없이 일단 보류라는 식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