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조만간 금융전업군 육성에 관한 방침을 확정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융전업군에 관한 논의는 "금융산업의 낙후성은 금융기관의
기업성 상실이 주된 원인"이라는 정확한 현실진단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금융의 기업성을 회복하려면 은행을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 금융기관의 경영효율성 제고를 위한 처방전의 핵심
내용이다.

다만 산업재벌에 의한 은행의 사금고화를 막기 위해서는 금융만을 전업
으로 하는 금융자본가 또는 금융기관이 은행의 지배주주로서 주인 역할을
하고, 같은 주인이 은행 이외에 증권과 보험을 망라하는 금융전업그룹을
소유 경영토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한도를 완화하여 주인있는 은행을 만들고 증권과 보험등을
겸업하는 그룹을 만든다는 처방은 지극히 단순할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한 처방이기 때문에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겸업에 따르는 문제도 있지만 지면관계상 "주인"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자.

주인이 있어야 낭비를 줄이고 효율이 높아진다는 논리는 역사가 짧고
규모가 작은 기업의 경우에는 확실히 설득력이 있고 실증연구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길고 규모가 초대형인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경우에는 20%
내외의 지분을 갖는 단일 지배주주가 있는 예가 다른 나라에는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경영성과가 뚜렷이 높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인의 전횡으로 소액주주와 기업의 이해관계자 집단에 피해를
입힐 수도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를 우리는
산업부문에서 많이 경험해왔다.

특히 은행의 경우에는 두가지 특수성 때문에 주인의 전횡으로인한 병폐의
가능성과 심각성이 일반 대기업보다도 더 크다.

첫째로 부채비율이 300%인 대기업의 경우 20%를 소유한 주인은 자기자본
투자금액의 약 20배에 달하는 규모의 자산을 지배하는데 비해서 은행의
경우에는 약3,000억원을 투자하여 30조원 규모의 은행을 지배하게 되므로
100여배의 높은 지렛대 효과가 있다.

둘째 은행은 지불결제기능과 저축자의 예금보호 필요성 때문에 정부가
보증하는 기관이다.

무료로 보증을 받는 기관에 기업성이 강조되면 지나치게 위험이 높은
사업을 하는 성향이 생기게 마련인데 자기자본투자규모에 비해서 지배
하는 부의 규모가 클수록, 즉 지렛대 효과가 높을수록 방만해지는 성향은
더 강해진다.

사실 한국의 대기업그룹들이 문어발식으로 방만한 경영을 해온 것은 적은
자본만으로 커다란 부를 통제할 뿐만 아니라, 경제규모에 비해서 재벌의
규모가 너무 커 도산이라는 시장규율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의 경험을 절대로 되풀이 할수는 없기 때문에 산업자본은 물론
금융자본가 또한 주인으로서 은행을 지배해서는 안된다.

사실 은행의 일탈적 행태에 따른 병폐가 너무나 클수 있다는 개연성
때문에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대형민간은행을 주인이 지배하는 경우는 단
하나의 예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국민주 방식의 소유분산하에서의 전문경영체제
인가. 아니다. 소유없는 부의 지배와 지배없는 부의 소유를 초래하는
교과서식의 소유와 경영의 완벽한 분리는 결코 성공할수 없다.

전문경영과 자율경영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책임경영을 담보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는 두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전문경영자를 단독으로도 감시 감독할 인센티브를 가지며,상호견제
때문에 혼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억제할수는 있는 힘을 갖는 대주주 집단의 존재이다.

한국주식시장의 기관화 추세와 기관투자가들이 책임경영을 유인하는
세계적인 추세에 비추어 보면 기관투자가를 중심으로 하는 대주주집단이
이러한 역할을 할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장치로는 기관대주주와 우리사주조합이 선임하는
비상임이사들로 구성되는 독일의 감독이사회와 유사한 제도를 제안한다.

기관대주주의 구체적인 행동원칙과 산업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기관투자가
의 부당한 주주권 행사등의 기술적인 문제는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두번째 요소는 성과향상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영.미에서와 같이 5년 또는 10년 후의 성과에 따라서 보상이 실현되는
주식옵션등의 장기실적에 연계된 보상체제의 도입을 제안한다.

기업의 자율경영과 책임경영을 담보하기 위한 적절한 기업통치체제가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원동력의 하나라는 사실이 구미에서 광범히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만은 대규모 기업이나 금융기관에도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후진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역사가 길고 규모가 큰 기업이나 은행의 경우 "주인"의 존재는 경영
효율성의 필요조건도 아닐뿐만 아니라 병폐가 매우 클 수 있다.

은행을 모델로 한국에 맞는 전문경영과 책임경영체제를 구축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