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상 명분에 자신을 옭아매는 아집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시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명분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봐야합니다"

지난 28일 지하철 2호선 사당역. 승객 20여명이 호흡곤란으로 질식상태에
빠지는등 지하철파업사 이후 최악의 대란을 지켜본 이상철씨(33.은행원)는
이같이 분통을 터뜨리며 정부와 지하철노조를 싸잡아 비난했다.

정부는 정부대로,노조는 노조대로 강경대응과 총파업에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실질적인 타협점과 사안은 무시한 채 자신들의
명분에 사로잡혀 지리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 이번 지하철파업은 단순한 임금협상이 명분을 앞장세운 고질적인
대정부투쟁및 노-노간 헤게모니싸움으로 퇴색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지난 4월중순 임금협상을 앞두고서 부터 정부의 3%
임금인상 가이드라인을 분쇄하겠다고 내외에 공식적으로 밝혔다.

정부가 매년 제시하는 가이드라인, 올해엔 특히 기본급 3% 인상만을
허용한 가이드라인 설정에 전면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즉 지하철노조는 얼마간의 임금인상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돼있는 임금
체계등을 깨뜨리겠다는 것을 파업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정부도 3% 임금인상 가이드라인과 현행 변형근로제을 고수한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촌보도 양보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올해도 정부는 3%의 인상방침을 고수,무슨 일이 있어도 이 원칙만은 관철
시키겠다고 거듭 밝혀왔다. 그러나 실제로 지하철공사측은 정부의 눈치를
살피며 11차례에 걸친 단체교섭끝에 기본급 3% 인상을 훨씬 넘는 평균
7.9%의 임금인상안을 제시했다.

기본급은 당초 정부방침대로 3%만 인상하되 월5만원의 안전봉사수당을
직능급에 통합하고 급식보조비 월7만5천원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킨
인상안을 마련, 노조측에 수용토록 요구하고 있다.

정부의 3% 가이드라인을 지킨다는 명분아래 안전수당을 기본급으로 새로
통합하는등의 편법을 동원한 것이다. 이제까지 정부투자기관의 임금인상
이라는 것이 거의 이런 식이었다.

물가안정을 위해 공무원의 봉급을 동결한다고 해놓고는 수당을 대폭
올리는 것은 관례화되다 시피했고 수당신설도 마다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대해 노조측은 스스로 지키지도 못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무조건
이에 따르라는 식의 정부방침이 결국은 "3% 임금인상 가이드라인의
분쇄"라는 명분을 파생시켰다고 인식하고 있다.

노조역시 3%의 기본급인상방침을 깨뜨려 실질물가인상분을 보전받겠다는
표면상 명분싸움으로 시민의 불편을 볼모로 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에대해 노동전문가들은 3%의 가이드라인을 분쇄하기 위해 전기협
전노대와 연대, 국가의 대동맥인 열차와 시민의 발을 묶어버리는 극한
단체행동의 명분 뒤에는 다른 의도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전노대 전기협등 노동운동세력간 연대를 통해 정부의 현행
임금체제를 구조적으로 바꾸고 노총.경총의 임금인상 합의안을 거부하는
수순을 밟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특히 제2의 노총을 자처하는 전노대내부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이같이 총연대파업이라는 초강경책을 썼다는 지적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결국 표면적 명분으로는 단순한 임금인상및 근로조건의 개선이지만 명분의
이면에는 대정부투쟁및 권력투쟁의 기치가 깔려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노동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명분에 사로잡혀 모든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
하려는 노사협상풍토가 노동문제를 사회문제로 비화시키며 시민들의 피해
를 강요하는 주요 원인입니다. 근로자 개개인을 물론 조직과 사회를 염두
에 둔 실질적인 협상태도가 어느때보다 절실합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