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판 위로 나가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철썩 철썩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섞여 어디선지 여자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토는 주춤 멈추어 서서 가만히귀를 기울여 보았다. 바깥 갑판 위 어딘가
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비명소리가 어쩐지 예사롭지가 않았다. 여자가 목이라도 졸리고
있는 모양인데 단순히 고통에서 터져나오는 그런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라,
깜짝 깜짝 놀라면서 내지르는 듯한, 어딘지 모르게 야릇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야, 이것 봐라"

이토는 후닥닥 계닥을 뛰어올라 성큼 갑판 위로 나섰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망망한 검은 밤바다 위에 달빛이 쏟아져 내려
출렁이는 파도에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후련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밤이었다.

그러나 이토는 지금 그런게 문제가 아니었다. 우뚝 멈추어 서서 그 야릇한
비명이 들려오는 쪽을 살폈다. 선미쪽이었다.

"흐흠"

이토는 혼자 묘한 웃음을 떠울리며 꿀꺽 침을 한 덩어리 삼겼다. 희한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살금살금 걸음을 그쪽으로 옮겨갔다. 선루의 바깥벽 한쪽을 돌아서니
저만큼 연기를 내뿜고 있는 거대한 굴뚝이 있었고, 그 굴뚝 구조물 모퉁이를
도니 마스트가 하늘높이 솟아 있었다.

마스트 저쪽 선미루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쪽 현측의 짙은 그늘 속에
나뒹굴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이토는 마스트에 살그미 그림자처럼 붙어섰다. 그리고 숨을 죽이며 두
남녀의 작태를 가만히 훔쳐보았다.

한사코 마다하는 여자를 기어이 정복하려고 남자가 마구 우격다짐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의 아랫도리가 찢기며 훌렁 벗겨지는 것
같았다.

짙은 그늘 속에 희끔한 맨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남자가 그위를 덮친
것이었다.

"어머- 싫어! 싫어!"

"가만 있으라구"

"아- 나 몰라! 난 모른다구!"

여자의 목소리가 꽤나 여렸다. 소녀 같았다.

누굴까? 이토는 밤고양이처럼 눈에 불을 켰으나 누군지 알수가 없었다.
짙은 그늘 속에서 남자에게 짓눌려 버둥거리고 있는 터이니 그럴 수밖에..

남자 역시 누군지 짐작이 가지가 않았다.

"악-"

마침내 여자가 뜨거운 것에 살이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냅다 비명을
사정없이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