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만 평생을 바쳐온 사람들에게서는 장인의 분위기가 풍기게
마련이다.

외길인생을 가능하게 한 고집스러움이랄까.

16세때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오로지 공작기계분야에 전력을 바쳐온
권승관 화천기공회장(78).

직함은 회장이지만 경영에서 손을 뗀지는 이미 오래고 현재는 하루 두번씩
생산라인을 살펴보는 일만 하고 있는 권회장을 광주 하남공단의 사무실로
찾았을때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할수 있었다.

얼핏 평범하게 보이는 정직이라는 단어를 일생의 화두로 삼아왔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권회장은 스스로를 기업가도 아니고 기술자도 아닌
얼치기라고 평한다.

-희수를 갓 넘기셨는데도 건강이 좋아 보이십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권회장=건강을 지키는데 무슨 비결이 있겠소. 그저 열심히 사는 거지.
평생 잔병치레는 안했는데 최근에 큰 수술을 받았어요. 다행히 거의 회복
됐어요.

-요즘도 회사에 매일 나오신다는데 일일이 다 챙기시는지요.

<>권회장=회사일 볼 것이 뭐가 있겠소. 젊은 아이들에게 다 맡겼어요.
일생을 공장에서 살아왔으니까 요즘도 하루에 두번씩 공장을 둘러봐요.
일을 어떻게 하나 보는 거지요. 사무관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 몰라요.

-공작기계와 인연을 맺게된 동기라도...

<>권회장=처음에는 공작기계가 뭔지도 몰랐지요. 16세때 일본사람이 운영
하는 전주의 주물공장에 들어간게 기계와의 첫인연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때는 가세가 괜찮았는데 옛날에는 흔한 것이었지만 백부 한분이
노름으로 재산을 많이 까먹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내것 없으면 곤란하지요. 고생을 참 많이
했고요. 그런데 어느날 농기구를 만드는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때 돈으로 한달에 2원씩 받을 수 있다고 합디다.

당시 2원이라면 굉장한 액수지요. 그래서 들어갔지요.

-해방후에 사업체를 가지게 되셨다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권회장=사업체를 운영하기전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요. 전주의 주물공장
에서 일하던 24세때 광주에서 같은 성격의 공장을 운영하던 일본사람이 내
얘기를 듣고 요샛말로 스카웃제의를 합디다.

한달에 1백50원을 준다고 해서 그자리에서 승낙하고 광주로 갔어요. 광주
공장에서 일하다 해방을 맞았는데 일본인 사장이 자네가 하면 잘 할
것이라면서 맡으라고 하더군.

-공작기계를 만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권회장=사업체를 갖고 한 15~16년동안 일을 해보니까 주물만 해가지고는
아이들을 학교에도 못보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공장
에서 쓰는 기계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지요.

58년 자유당시절에 시작했는데 그때는 벨트로 움직이는 선반을 만들었지.
만들기는 했지만 어려움이 많았어요. 잘 팔리지도 않았고. 그런데 그때
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박정희대통령 덕택에 사업체가 많이 성장했어요.

-지금은 공작기계, 특히 수치제어기(NC)분야에서 대기업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명성을 얻고 있는데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권회장=68년에 시작했어요. 당시 난생 처음으로 일본에 갔지요.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한 교포가 초청해서 갔는데 그때 정말 놀라기도 많이 하고
배우기도 많이 했지요.

일본에 가기전에 구동식 선반을 만들기 시작하긴 했는데 거기에 가보니까
우리것은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졌습디다. 일본에서는 벌써 NC를 시작하고
있었어요.

돌아오자마자 NC를 시작했지요.

-사업가도 아니고 기술자도 아닌 얼치기라고 말씀하셨지만 지금 말씀을
들으니 사업가적인 안목도 대단하신것 같군요.

<>권회장=그렇지 않아요. 나는 단지 공장에서 기계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어요. 일본에 가서
보니까 우리것이 팔리지도 않을 것 같고해서 시작한 겁니다.

-한평생 한가지 사업만 하다보면 요즘 흔히 볼 수 있듯이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에 유혹을 느끼기도 하셨을텐데요.

<>권회장=물론 내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부동산투기 같은 것으로 돈을 번
사람도 있고 주변의 권유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일에는 손을
안댔어요. 괜히 그런데 신경을 쓰다가 일이 잘못되면 공장일만 망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더군요.

-광주에 자리를 잡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권회장=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사업체를 가진 곳이지요. 또 우리 아이들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고요. 한때 상공부 사람들이 영감님은 왜 사업입지도
별로 안좋은 곳에서 사업을 하느냐고 물읍디다.

물류비용이라든가 여러가지 비용적인 측면에서 물론 이곳이 서울 가까운
곳보다 불리하지만 내 뜻에 맞으니까 여기가 좋더군요. 여기 사람들한테
일자리도 주고 좋지 않습니까.

-사업을 하다보면 흔히 자금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권회장=물론 있지요. 첫번째는 70년대초였어요. 물건은 안팔리고 돈은
없지. 할수 없이 사채를 좀 썼어요. 아 그런데 그 8.3조치가 나오지 않겠어.

정부에서 사채를 보고하라고 하는데 양심상 할 수가 없더군요. 내가 필요
해서 썼는데 정부의 특별조치가 있다고 해서 보고를 해 버리면 내가 이득은
좀 보겠지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리담당에게 절대 보고하지 말라고 하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한테도 걱정
하지 말고 가만히만 있으라고 하고는 부산으로 잠시 피했어요. 반역행위를
한거지요. 그때 사채규모는 6천만~7천만원정도 됐는데 다 갚았어요.

-그뒤로는 자금문제가 없었습니까.

<>권회장=아니지요. 80년초에 창원공단이 들어서고 거기에다 공장을 지을때
또 한번 어려웠어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씨가 세번
이나 불러서 창원공단의 공작기계공장을 하나 맡으라고 하잖아.

돈도 없고해서 안하려고 했는데 여러번 요구하니까 할수 없이 맡았어요.
물론 미국에 가서 수출 가능성을 미리 알아보기는 했지만. 기계 사오는
돈으로 정부에서 한 백만달러정도 지원을 받았죠.

창원공장이 준공된 해가 79년인데 그때 불황이 닥쳐서 자금난으로 허덕
였어요. 그런데 그만 10.26사태가 나서 박대통령이 사망했어요. 그 소식을
듣고 엉엉 울어버렸어요.

그때부터 83년말까지 죽을 고생을 했어요. 그때 자살할 생각까지 했지.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울기도 많이 했지요.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권회장=전두환대통령때 자금지원을 받아서 겨우 버텼어요. 당시 10개의
노사모범업체 노사대표를 초청, 전대통령이 오찬간담회를 가졌을때 참석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회사가 잘되고 있다고만 말합디다.

안되겠다 싶어 손을 들고 말을 했지요. "내가 시방 현재까지 사업을
시작한지 만 50년이 됐는데 종업원들 월급도 못주고 있소. 다른 사람들은
다 잘된다고 하는데 하필 광주의 화천기공만 못한다고 해서 죄송합니다만
사실대로 말합니다"라고 했더니 "영감님 고생많이 하십니다"고 합디다.

그러고는 오찬이 끝나서 나오는데 웬 키가 멀쩡히 큰 사람이 부르더니
주거래은행이 어디냐고 물어봅디다. 그옆에 있던 권중동노동부장관한테
이분한테 인건비나 지불할수 있도록 하라고 합디다.

그게 누군지도 몰랐는데 다음날 상공부를 찾아가니까 그양반이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라고 하더란 말요. 아따 이제 됐다 싶어 다시
청와대로 그양반을 찾아가 자금지원을 약속받고 36억원인가를 받았어요.

그 돈으로 얼마간은 버텼어요. 그러다가 경기가 좋아지고 기계도 팔리고
해서 84년인가 흑자가 한 4억원 나데요. 그뒤부터 지금까지는 별 어려운일
없이 커왔어요.

-요즘은 대기업들도 공작기계분야에 뛰어들었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권회장=대기업들은 기술제휴를 통해서 하고 있지만 우리야 우리힘으로
해왔소. 아직도 자신있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공작기계만은 대기업한테
안집니다.

-요즘은 국제화 세계화가 유행인데 권회장님은 일찍이 해외의 기술동향을
파악하고 앞서 나간 느낌이 드는군요.

<>권회장=나는 그런 어려운 말은 몰라요. 그저 하다보니까 해외시장을
먼저 생각하게 됐고 기술만 생각하니까 남들이 앞서가는 것을 참을수 없어
따라가게 된거지요.

국제화가 뭐 별다른 것이 있겠어요.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세계수준에
뒤떨어지지 않게 노력하면 국제화가 되는 거지요.

-자제분들을 포함해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마디 부탁합니다.

<>권회장=정직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또하나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한가지 일에 매달려서 죽거나 살거나 해야지 이것이 좋은가
저것이 좋은가 하면 못씁니다.

아 그리고 또 한가지 절대로 남의 빚 보증은 서지 말라는 겁니다. 어쩔수
없을때는 돈을 좀 마련해 주는게 훨씬 좋아요.

< 대담 = 김형수 국제1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