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모임은 이름도 없고 어떠한 형식이나 규제도 없다.

뚜렷한 목적의식도 없고 입회자격이나 공통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모인 동기를 찾자면 경기고 62회출신인 필자와 가까운 동기들 몇명
이서 7년전쯤에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동기의식은 오히려 희박해졌고 다른친구들도 참여하고
있다.

우리들은 정기적인 모임일을 따로 정해둔 것도 아니지만 1주일에도
2-3차례이상 모인다.

누군가로 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바로 그날밤이 집회일이다.

모여야 되는 명분은 수없이 많다.

나쁜 녀석을 혼내줄 청문회 개최, 술을 왜먹는지 알아봐야 된다는 학구적인
취지, 주당들의 소외감풀기 등등.

지난번 모임에서는 한 친구가(이름은 밝힐수 없음) 오래전에 술집마담에게
반지를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지키지 않고 있어 이를 재판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모임중의 대형임을 자처하는 한양대 법대의 양건교수가
재판관으로 나섰다.

이 사건은 현직 서부지청차장으로 있는 유명진 검사가 맡게 되었다.

그는 술먹으면서 하는 재판은 난생 처음이라며 이래도 되느냐고 좌중의
동의를 구한다.

양교수는 취중에 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명판결을 내렸고, 우리는
이를 자축하는 축하주로 또다시 취흥을 돋구었다.

우리들 모임중에는 연극 "아가씨와 건달들"을 연출한 윤호진씨가 있다.

그는 수시로 우리들에게 문화적 분위기를 가르쳐 주는 교양강좌 강사역할을
한다.

윤호진씨 덕에 우리들은 수시로 연극 구경을 가게 된다.

연극이야기가 나온 김에 비리를 공개하자면 몇몇 친구들은 연극구경보다
속셈은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연극후의 아름다운 여배우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수
있다던가 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끝난후에 같이 술을 마실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극을 보는 도중 그만 코를 골았던 적이 있었다.

이역시 혼날일이 아닌가.

우리들은 그를 혼내주기 위해 또 술을 마셔야 했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들이 모이는 진짜 이유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다.

사회적 체면을 의식하지 않고 우리끼리 마음놓고 술마시며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격의없이 만나는 인물들을 소개하자면 오는 9월 윤이상씨와 함께
오페라 "나비의 꿈"을 연출하는 조성진씨가 있고, 지나친 과음으로 1학기
휴직까지 한 경원대 법정대의 장시석교수, 전 포철회장과 이름이 같고 하는
업종(철강취급)까지 같아 포철 출입시 제2의 박회장으로 통했던 태강물산의
박태준사장, KIST의 한석기연구원, 삼미의 이기병전무 등등이다.

우리들은 최근 일요일 11시쯤 북한산을 오르기도 한다.

이역시 명분은 술을 마시기 위해서다.

건강해야 술을 마실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그러나 우리들의 참뜻은 걸림없이 사는 자유인이 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