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에 살면서 저녁에 고속도로를 벗어나 아파트의 불빛이 마치 큰 병풍
처럼 둘러쳐진 마을로 가는 큰길에 서면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집으로 들어가는 드라이브웨이와 같은 길을 초고속으로
달려나가기 때문이다.

코앞에 있는 길을 놓고 그것도 퇴근시간에 미친듯이 초고속으로 달려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생각만 하면 온통 차를 타고 다니면서 부딪치게 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이런 교통문제를 사람들과 앉았을때 끄내기라도 하면 첫마디가 "차가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 참으로 차가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차가 늘어나서 일으키는 이
혼란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먼저 주목하여 볼 점은 차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재가 고등학교에 다닐때만 해도 차는 권력과 부귀의 고위층만의 재산
표시용이어서 감히 일반인은 꿈도 꾸지 못했고 전화가 빈부를 가늠하는
잣대였다.

집에 전화가 있는 아이가 한반에 열명도 채 안되었던 것이다.

지금 누가 집에 전화를 가졌다고 자랑이나 하면 동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제는 차가 옛날의 차가 아니다. 오늘의 전화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독 차에 대해서만은 재산의 개념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차를
탄다는 것에 대해 신분상승의 기분이나 부의 과시수단이 되는 경우를 볼수
있다.

그 이유는 전화는 집에 두고 다니지만 차는 거리에 나와 여러사람이 보아
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외제차라도 타고 다니면 그차를 살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릴수 있고
또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느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차를 깨끗하게 닦아서 몰고 다니며
조그마한 접촉사고로 흠질이 나도 길에 세워놓고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것도
차를 재산의 표징으로 보는 인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차를 재산의 개념으로 여기는 이와달리 차를 생활의 필수적 도구로
여기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도 인간을 실어나르는 기계로써 남과 함께 움직이는 위험한
도구라는 의식이 부족한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볼수 있다.

텅빈 올림픽도로에서 한밤중에 급하게 커브를 틀다가 가드레일을 박고
뒤집힌 것을 보았다.

브레이크가 마음에 세워야겠다는 순간에 서지지 않는 기계라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자동차는 기계이고, 그 기계의 속성에 알맞게 조절해야 하는 과학적
인식이 없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조차 툭하면 통행세나 걷어서 다니지 못하게 막는
규제의 방식에만 열을 올리고 어떻게 합리적으로 차를 타야 함께 편리하고
효융적으로 차생활을 할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게을리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수있다.

규제가 만능일수 없는 것이다. 규제를 하려면 간단하게 자동차생산대수를
제한하면 된다.

그렇지만 누구나 타기를 원하는 차를 타게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이제 새삼스럽긴 해도 몇년전 눈이 펑펑 쏟아진 날 캐나다의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이 나서 차밖에 나와서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서 있었다.

새벽 세시경이라서 지나가는 차가 없었다.

영하 십팔도가 내려간 날이라서 손이 얼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 큰 화물차의 불빛이 보였고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큰 차는
내앞에 섰다.

내가 서서 손을 든 첫번째 차였다. 나는 화물차 운전석에 올라타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년의 운전기사는 "내가 고장이 나서 섰을때 누가
구해주지 않으면 얼어죽고 말지요"하는 것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겨울에 길에 서있는 이를 먼저 발견한 사람이 꼭
태워주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고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살아가면서 추운 겨울 누구나 길에서 차가 섰을때 얼어버릴수
있다는 것을 모두 모두 알기에 세울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차문화, 즉 살아가면서 서로 차를 왜 가지고 있는가와 이를
남과 어떻게 조화롭게 가지고 다닐수 있는가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