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540) 제3부 정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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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위협 외교인 셈이었다. 가스가마루와 유코마루 두 군함
이었는데 하나부사는 육군 중좌(중령)인 기다무라시게오리와 대위인
벳푸신스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 두 장교는 군복에 군도를 차고 하나부사를 좌우에서 호위하여
당당히 상륙했다. 수교 교섭에 있어서 동래부 측에 압력을 가하는
의미도 있었고 일이 끝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앞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동래부 측에서 두려워할 턱이 없었다. 오히려 더 강경한 입장
을 취하여 즉시 군사를 요소요소에 배치했고 철시를 단행했다. 그리고
동래부사는 그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위협 외교도 아무 효력이 없자, 하나부사는 대신 왜관을 외무성 직할
기구로 정비한 다음 자유무역을 선언했다.
그때까지는 쓰시마번의 특허장이 있는 배만 교역을 할수있었는데 그것을
일방적으로 폐기해버린 것이었다. 폐번치현으로 쓰시마번이 없어졌으니
일본측에서 볼때는 그 특허청장이라는 것은 이제 무효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새로 특허장을 발행하지 않고, 누구나 자유스럽게 무역을 할수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러나 동래부 측에서는 지금까지의 관례대로 쓰시마
번만을 상대하는 터이니 그런 조치는 인정할수가 없었다.
동래부가 받아들이지 않는 조치를 하나부사가 일방적으로 취한 것은
자기네를 만나주지도 않는 동래부사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리고 수교 교섭에 응하지않는 조선국의 통치자인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런 조치를 취한 다음 하나부사는 조선땅을
떠났는데 두 군함중 유코마루는 곧바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스가마루는 은밀히 동래 부근 해안지대를 측량하고 다녔다. 그
군함에는 하나부사가 타고 있었다. 앞으로의 정벌에 대비한 사전 현지
탐색인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부사를 수행했던 기다무라다 벳푸는 어느 군함에도 타고 있지
않았다. 그들 두 육군장교는 귀국을 하지않고 왜관에 남아있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은 밀정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던 것이다.
조선말에 능통하고 용모도 일본인이라기보다는 조선인에 가까운 두 사람은
행상으로 변장하여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땅을 두루 밟으며 정탐을
하고 다녔다. 그들 역시 침공에 대비하여 사전에 지리를 조사하고 지방의
군비 또는 내정과 민심의 동향 따위를 살폈던 것이다.
이었는데 하나부사는 육군 중좌(중령)인 기다무라시게오리와 대위인
벳푸신스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 두 장교는 군복에 군도를 차고 하나부사를 좌우에서 호위하여
당당히 상륙했다. 수교 교섭에 있어서 동래부 측에 압력을 가하는
의미도 있었고 일이 끝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앞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동래부 측에서 두려워할 턱이 없었다. 오히려 더 강경한 입장
을 취하여 즉시 군사를 요소요소에 배치했고 철시를 단행했다. 그리고
동래부사는 그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위협 외교도 아무 효력이 없자, 하나부사는 대신 왜관을 외무성 직할
기구로 정비한 다음 자유무역을 선언했다.
그때까지는 쓰시마번의 특허장이 있는 배만 교역을 할수있었는데 그것을
일방적으로 폐기해버린 것이었다. 폐번치현으로 쓰시마번이 없어졌으니
일본측에서 볼때는 그 특허청장이라는 것은 이제 무효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새로 특허장을 발행하지 않고, 누구나 자유스럽게 무역을 할수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러나 동래부 측에서는 지금까지의 관례대로 쓰시마
번만을 상대하는 터이니 그런 조치는 인정할수가 없었다.
동래부가 받아들이지 않는 조치를 하나부사가 일방적으로 취한 것은
자기네를 만나주지도 않는 동래부사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리고 수교 교섭에 응하지않는 조선국의 통치자인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런 조치를 취한 다음 하나부사는 조선땅을
떠났는데 두 군함중 유코마루는 곧바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스가마루는 은밀히 동래 부근 해안지대를 측량하고 다녔다. 그
군함에는 하나부사가 타고 있었다. 앞으로의 정벌에 대비한 사전 현지
탐색인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부사를 수행했던 기다무라다 벳푸는 어느 군함에도 타고 있지
않았다. 그들 두 육군장교는 귀국을 하지않고 왜관에 남아있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은 밀정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던 것이다.
조선말에 능통하고 용모도 일본인이라기보다는 조선인에 가까운 두 사람은
행상으로 변장하여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땅을 두루 밟으며 정탐을
하고 다녔다. 그들 역시 침공에 대비하여 사전에 지리를 조사하고 지방의
군비 또는 내정과 민심의 동향 따위를 살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