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 국사가 망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백암 박은식(1859~1925)은 이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유교인 대동교를 세웠고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문혈사"등을 저술
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민족사학자다.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서당훈장을 하는 아버지아래서
과학공부를 하면서 유교의 경전과 주자학을 익혔다.

22세때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 정관섭을 찾아가 다산의 저술을
탐독했고 26세때는 당시 윙정근사의 거두었던 화서 이환노의 문인 박문일
박문오형제의 문하에서 조선시대 도학의 정통적 학맥을 계승했다.

그러나 백암은 40세되던 해인 1898년 국제정세의 변화와 서양학문의 지식에
충격을 받고 독립협회에 가입,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며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어 계몽운동에 나섰다.

이무렵부터 그는 전통도학의 학풍을 떨쳐버리고 개화사상에로 전환한듯
싶다.

그렇지만 백암의 개화사상이란 전통을 부정하고 서양의 것을 그대로
따르려는 입장이 아니라 그 정신적 기반을 우리문화의 전통(국교)인
유학위에 수립해야 한다는 주체적 자각이었으며 그것의 기반은 주자학보다
실천적인 양명학이었다.

백암이 장지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을
소크라테스 칸트 버클리 데카르트 베이컨의 학설과 부활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을 알수있다.

실제로 그는 1909년 대동교를 조직, 개혁유교의 실천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백암은 정통주자학을 공부했던 한 지식인으로서 유학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전통을 새시대의 요청에 맞도록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 했던 위대한
선비였다.

아마 그는 한국근대사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우림의 마지막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을 떠난뒤 그에게 붙여진 "신흥조선의 국택 박부자"란 최상급의
존칭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문화체육뷰는 백암의 유해봉안 1주년과 광복49주년을 기념해 8월을
"박은식의 달"로 정하고 그를 기리는 갖가지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백암을 임정의 제2대사를 체계화시킨 민족사학자로만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끝까지 "대한유림의 일분자"임을 자처하면서 유교의 개혁방안을 실천에
옮기려던 그의 한국사상사적 위치가 재정립되는 기회가 됐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