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마무리작업과 계획했던 몇가지 일에서 벗어난 여름날 오후 모처럼의
여유에 연극 2편을 보기로 했다.

먼저 개인적으로 상당히 매료됐던 희곡작품이 연극으로 탄생한데 대한
기대와 설렘때문에 오래전부터 보고싶었지만 거리가 멀어 좀처럼 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던 작품을 선택했다.

공연장에 도착해서 보니 매표소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다른
공연장에서 쉬이 마주칠수 있는 그런 관객은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도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의 그들은 소위 "중상층 주부관객"
이었으며 "엄마, 남자는 하나도 없어"라는 한 꼬마의 말은 그 연극의
관객층이 어떤지를 알려주는 정확한 지적이었다.

관객들이 극장을 찾는 동기는 다양할수 있다.

설사 그것이 출연배우 개인의 지명도와 인기에 우선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공연의 질이 우수하고 관극태도가 진지하다면 그건 결코 나무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소극장운동이 일기 시작한이후 여대생 일변도의 관객편중 현상을
아쉬워해왔던 연극계에 "주부관객"이라는 새로운 관객층의 형성은 진정
기쁜일이기도 하다.

특히 그들이 지속적인 관객이 될때의 풍요로운 객석을 상상해보는 것은
즐겁기마저 했다.

하지만 그 공연장에서 나타난 관극행위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하찮은 연극적 기교에 탄성을 연발하고 표피적 사실들에 공감을 나타내는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관극행위는 연극관람층의 확대라는 기대섞인 상상에
제동을 걸었으며 뜻있는 소수 관객의 집중도도 저하시켰다.

무대와 객석이 서로를 의식한채 공연이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땐
불쾌감마저 일었다.

무대와 객석, 양자 사이에 있어야할 객관적이고 내적인 진실의 공유가
없다고 느꼈을 때의 실망감이란.

그렇게 연극이 끝난후 찜찜한 여운속에서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다음
공연장으로 향했다.

두번째 연극은 장기공연중이니까 언젠가는 보게 되겠지 하는 안이함으로
관람을 미뤄왔고 또 예사롭지 않은 대중적 관심에 오히려 기피하기까지 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됐든 한번쯤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친김에
보기로 했다.

종전에 본 연극과는 대조적으로 관객층은 비교적 다양해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연극을 보면서 느낀 씁쓸함은 이곳에서도 여전했다.

장기공연이 장려돼야하는 풍토이긴 하지만 그것이 공연의 타성화를 불러
온다면 관객을 우롱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느낌이었다.

또 아무리 화제에 올라 장기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더라도 질이 미치지
못한다면 관객쪽에서 외면하고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관객이 와줄거라는 게으른 낙관론이 배어있는 무대를
바라보며 그 극단이 과감히 막을 내리고 새로운 무대예술의 창조로 흔쾌히
방향전환을 시도하는게 옳을듯 싶다는 생각까지 하며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본 두편의 연극이 감정의 정화는 고사하고 담담한
미학적 경험에도 접근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아쉬움은 더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무심코 근처의 재즈카페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하루의
공허함을 다 채울만한 생생한 공연을 만나게 됐다.

별다른 생각없이 차를 마시던 도중 더할나위없이 충실한 자세로 피아노를
두드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는 이의 소리가 갑자기 가슴에 와
부딪쳤던 것이다.

그녀는 연주를 듣기위해 일부러 찾아온 사람이 아닌 몇안되는 손님앞에서
너무도 당당히 자신의 연주를 하고 있었고 무심한 손님은 어느새 거기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오후내내 찾아다니고 기다렸던 것은 혼신을 다하는 진실한 무대였고 거기에
마음을 다해 공감하는 객석이었던 것이다.

늦게나마 우연찮은 곳에서 그 감동을 발견한 것은 나에겐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