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200) 김준형 행남자기회장 (2)..효자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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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218번지.
부친 김창훈(김해 김씨, 수로왕의 71대손)과 모친 금성 정씨(명 윤애)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한일합방의 비통이 채 가시지 않은 1914년 5월 11일에
태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영광을 "옥당골"이라 부르는데, 그 유래는 효자나 열녀가
많이 나오거나 고을 사람들의 인심이 후덕하고 성정이 온순한 고을이라는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이런 영광에서도 효자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이유는 나의 조부(김응균, 자:현숙, 아호:영순)의 살을 베어서 노모를
봉양했던 일화로 비롯된 것인데, 그 내용이 영광군사의 "무영 삼강록 상
구십"에 실려 있다.
김영순은 본관이 김해로 철종 경신년생이다.
천성이 순하고 효성이 지극하나 일찍이 부친을 여읨으로써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항상 지극히 고통스러워 했다.
그래서 편모를 섬길 때는 더욱 정성을 다하였는데 그가 18세 되는 정추년에
어머니의 병이 더욱 심하여 달을 넘겨도 치유가 되지 않았다.
집이 너무 가난하고 또 흉년을 만나 약과 먹을 것이 떨어져 예부터 알고
있던 친척에게 도움을 구하였으나 병이 낫지를 않았다.
그래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끓여 갖다 드리자 회생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성도 보람없이 모친이 돌아가시자 그의 애통해 슬피우는
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그의 근심스러운 얼굴색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것을 안 조정에서는 그를 효자라 하여 물고기가 수놓인 좋은 옷감에
쌀과 고기를 보내고 효자 김영순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후에 고을의 관직을 지냈던 박제교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이야기를
물어 글로 남김으로써 고향을 이야기할 때는 김영순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 살림은 그리 풍족하진 못했던 듯 싶다.
그렇다하더라도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당시의 보통집안 살림에 비교한다면
밥을 굶었던 기억은 없으니 그래도 괜찮은 살림이었다.
이렇듯 살림은 비록 보잘것 없었으나 재부의 다소보다는 도학적 덕목을
숭상했던 당시 사회에 효자로 알려진 조부께서는 내나이 네살때 그러니까
47세의 나이로 작고하실때까지 영광 일대에서 처신하기에 하등의 부족함이
없었다.
부친께서 얘기해준 조부님은 성품이 강직하고 평생동안 근검 절약하는
선비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아버님은 이미 18살 때부터 군청에 들어가 재무과에서
학교교육 예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인들은 지방에 있는 향교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보통
학교를 비롯한 신식학교를 열었는데 그 예산관리를 아버님이 담당한 것이다.
아마 행정업무가 분화된 요즈음 같으면 군교육청의 관리과 관리계장 정도의
일이었을 것이다.
부친은 유년시절에 읍내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개화바람이
불어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사설학원으로 문을 열고 있던 광흥
중학원이라는 곳엘 다니셨는데 당시 아버님 나이 또래 사람들의 교육정도에
비교해 본다면 상당히 개화된 분이셨다.
조부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부친인지라 나에게도 근면하고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의 내 신조로 삼고 있다.
지금도 나는 함부로 돈이나 물자를 낭비하는 일을 삼가고 있는데 음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집 밖에서 밥을 먹을 땐 꼭꼭 내 차를 운전하는 기사와 함께 검소한
식단으로 식사를 한다.
그 일로 해서 한번은 주위 사람으로부터 핀잔을 들은 일도 있지만 나는
결코 개의치 않는다.
이것이 나의 자랑이고 자부심이다.
부친 김창훈(김해 김씨, 수로왕의 71대손)과 모친 금성 정씨(명 윤애)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한일합방의 비통이 채 가시지 않은 1914년 5월 11일에
태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영광을 "옥당골"이라 부르는데, 그 유래는 효자나 열녀가
많이 나오거나 고을 사람들의 인심이 후덕하고 성정이 온순한 고을이라는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이런 영광에서도 효자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이유는 나의 조부(김응균, 자:현숙, 아호:영순)의 살을 베어서 노모를
봉양했던 일화로 비롯된 것인데, 그 내용이 영광군사의 "무영 삼강록 상
구십"에 실려 있다.
김영순은 본관이 김해로 철종 경신년생이다.
천성이 순하고 효성이 지극하나 일찍이 부친을 여읨으로써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항상 지극히 고통스러워 했다.
그래서 편모를 섬길 때는 더욱 정성을 다하였는데 그가 18세 되는 정추년에
어머니의 병이 더욱 심하여 달을 넘겨도 치유가 되지 않았다.
집이 너무 가난하고 또 흉년을 만나 약과 먹을 것이 떨어져 예부터 알고
있던 친척에게 도움을 구하였으나 병이 낫지를 않았다.
그래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끓여 갖다 드리자 회생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성도 보람없이 모친이 돌아가시자 그의 애통해 슬피우는
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그의 근심스러운 얼굴색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것을 안 조정에서는 그를 효자라 하여 물고기가 수놓인 좋은 옷감에
쌀과 고기를 보내고 효자 김영순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후에 고을의 관직을 지냈던 박제교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이야기를
물어 글로 남김으로써 고향을 이야기할 때는 김영순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 살림은 그리 풍족하진 못했던 듯 싶다.
그렇다하더라도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당시의 보통집안 살림에 비교한다면
밥을 굶었던 기억은 없으니 그래도 괜찮은 살림이었다.
이렇듯 살림은 비록 보잘것 없었으나 재부의 다소보다는 도학적 덕목을
숭상했던 당시 사회에 효자로 알려진 조부께서는 내나이 네살때 그러니까
47세의 나이로 작고하실때까지 영광 일대에서 처신하기에 하등의 부족함이
없었다.
부친께서 얘기해준 조부님은 성품이 강직하고 평생동안 근검 절약하는
선비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아버님은 이미 18살 때부터 군청에 들어가 재무과에서
학교교육 예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인들은 지방에 있는 향교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보통
학교를 비롯한 신식학교를 열었는데 그 예산관리를 아버님이 담당한 것이다.
아마 행정업무가 분화된 요즈음 같으면 군교육청의 관리과 관리계장 정도의
일이었을 것이다.
부친은 유년시절에 읍내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개화바람이
불어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사설학원으로 문을 열고 있던 광흥
중학원이라는 곳엘 다니셨는데 당시 아버님 나이 또래 사람들의 교육정도에
비교해 본다면 상당히 개화된 분이셨다.
조부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부친인지라 나에게도 근면하고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의 내 신조로 삼고 있다.
지금도 나는 함부로 돈이나 물자를 낭비하는 일을 삼가고 있는데 음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집 밖에서 밥을 먹을 땐 꼭꼭 내 차를 운전하는 기사와 함께 검소한
식단으로 식사를 한다.
그 일로 해서 한번은 주위 사람으로부터 핀잔을 들은 일도 있지만 나는
결코 개의치 않는다.
이것이 나의 자랑이고 자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