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김재실부장이 동경지점장과 국제부장을 마치고 금융1부장에
화려하게 컴백한 것은 지난 1월. 이 부서에서 부부장을 하고 00년
동경으로 떠난지 0년만이다.

금융1부는 대기업 여신담당으로 자금할당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곳.
"끗발"이 세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서였다. 김부장이 부부장때만해도
그랬다.

그러나 0년만에 돌아온 김부장은 한마디로 "격세지감"을 느껴야만 했다.
금융환경이 과거와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김부장이 우선 절감한 변화는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 바빴던 직원들이 이젠 자주 "출장"을 나간다는 것.

출장은 대부분 신규거래처개발건. "출장"이 외형상 변화라면 두번째의
변화는 "업무"내용". 과거엔 기업들이 자금을 요청하면 규모를 줄이느라
고심했는데 이제는 적정 기준에만 맞으면 자금을 깍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할때 우리 자금을 더 쓸 수 있게
하는가가 고민"이라는 김부장은 "이제는 나도 "출장"을 나갈 생각"이라고
말한다.

산업은행은 일반 시중은행과는 달리 "장기.저리"의 정책자금을 많이
다루는 특수은행. 준공공기관처럼 근엄하게 기업들에게 자금을
나눠줘왔다.

경쟁의 무풍지대인데다 자금분배권이라는 힘까지 얹혀 있는 탓에 그렇게
까지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었다. "앞서 뛰면 다친다"는게 직원들 사이에
구전되어온 행내 슬로건이었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가 "부장까지 뛰어야"
할 정도로 바뀐 것은 분명 변화중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산업은행의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이제 설비투자자금을 공급하는데도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기 때문.

우후죽순 생겨난 25개 리스회사들이 역마진까지 감수하며 앞뒤 안가리는
덤핑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리스료율의 급격한 인하를
가져왔다.

기업들의 리스 선호도도 점점 높아졌다. 국내 전체설비투자중에서 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80년대 후반까지 10%안팎선에 불과했으나 올핸 25%
가까이 확대될 전망(한국리스금융협회)이다.

산업은행이 이럴진대 일반 시중은행은 더말할 나위가 없다. 부장급이
"고상하게" 섭외다니는데 그치지 않는다.

"접대란 이제 하는 거지 받는게 아닙니다. 예금이나 외환거래를 좀 끌어
오기위해 중소기업체들의 젊은 자금담당과장급까지 골프를 모셔야 할
정도"란게 시중은행 일선 지점장들의 얘기다.

은행들이 기업앞에서 이처럼 힘을 못쓰게 된데는 여러가지 원인 있다.
우선 기업들의 직접금융확대. 직접금융이 간접금융보다 많아진 것은 물론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82,83년에도 직접금융의 비중이 커졌지요. 이땐 70년대말 설립된
투자신탁회사들이 투자운용대상으로 회사채 매입을 늘려나간데다 82년
4개 후발투금사들이 생겨 기업들이 "회사채와 어음"발행으로 자금을 많이
가져갈수 있었습니다.

88,89년에는 "주식"시장에 활황에 힘입어 직접금융시장이 커졌고요.
앞으로도 직접금융비중이 커지는 추세는 계속될 것입니니다"

한국은행 조사2부 안용성조사역의 분석이다. 안조사역은 그러나 "외형상
직접금융의 비중이 높아졌다해도 기업들이 어음이나 회사채발행을 통해
투금사나 투자신탁에서 가져가는 자금이 많아 그게 꼭 "금융기관의
의존도"가 낮아졌다고는 설명하기 곤란하다"며 "정확하게 얘기하면
"은행의 의존도"가 줄었다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은행의존도 감소, 다시말해 탈은행화는 대기업들의 은행대출금이 줄어
드는데서 잘 나타난다. 대기업들에 대한 은행대출은 지난 3월말현재
22조6백30억원으로 은행총대출의 25.3%를 나타냈다.

대기업들의 대출비중은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이나 대출금의 절대액수가
줄어들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에반해 기업들의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은
올해도 큰 폭으로 늘었다.

상반기 기업들의 직접금융조달실적은 주식.채권 모두 합해 12조7천71억원.
작년 상반기의 8조8천2백70억원보다 44% 늘어난 규모다.

이중 두드러진 추세는 전환사채(CB)의 발행증가. 모두 1조4천8백8억원의
CB가 발행돼 증시사상 연간 단위로 봐도 최대(지금까지는 89년 1조1천7백
84억원)를 기록했다.

이중에선 금리가 더싼 무보증CB도 75%나 차지한다. 기업들이 싼자금을
다양하게 조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업들이 은행을 떠나며 체력을
키우는 동안 은행산업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그러나 대형화를 통한 몸집키위기가 아닌 군소은행들의 탄생.
외환은행을 포함 6개이던 시중은행이 신한 한미(80년대초)동화 동남
대동(80년대말)하나 보람 평화(90년대초)등 10년만에 8개가 더 늘었다.
수적으로만 보면 배보다 배꼽이 커진 셈이다.

한 대기업관계자는 "산업구조가 노동집약에서 자본.기술집약으로
바뀌면서 투자금액이 수십배이상 늘어나는등 기업들의 덩치는 커졌지만
은행들은 옛날 모습 그대로"라며 "기업들이 "황새"가 됐다면 은행은 아직
"뱁새"수준"이라고 말한다. 뱁새가 황새의 먹이를 구해다 줄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지난 1년 사이에 더욱 두드러졌다. 위성복조흥은행상무는
"2,3단계금리자유화와 실명제가 탈은행화를 더욱 가속화시킨 2대요인"
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실명제이후 풀어놓은 자금이 은행으로 들어왔는데 기업은 쓰지 않으니
"자금을 써달라"고 매달리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또 금리자유화는 금리탄력성을 높여 이제 가계자금까지도 은행아닌 다른
금융기관의 고금리상품을 찾아나섰다는 설명이다.

기업들의 탈은행화는 금융기관들을 "호송선단의 낙제자가 생길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간다. 낙제자가 되지않기 위한 은행들의 경쟁심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 과정속에서 금융의 선진화와 기업의 금융비용은
감소가 이뤄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