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산업] 세종때 갑인자 기술 '절정'..인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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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바탕을 정신''이라고 한다면 우리민족문화의 바탕은 바로 인쇄문화
에서 비롯됐다고 할수 있다.
인쇄문화에 관한한 세계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갖는 까닭이다.
지난 66년 불국사석가탑 사리함속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타라니경''(751년.
경덕왕10년)은 목판인쇄물로서는 세계최초의 것이다.
개방화 국제화시대를 맞아 한국인쇄문화의 창달과 발전을 향한 지향적 좌표
설정을 위해 우리가 걸어온 인쇄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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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려 ]]]
신라말기의 인쇄문화는 고려로 접어들자 사찰에 의해 계승, 발달됐다.
고려초인 1007년 개성의 총지사가 간행한 "보협인타라니경"은 이보다 앞서
간행된 중국의 오월판에 비해 그 판각술이 우수하고 판화 또한 실감있게
새겨졌다.
이같은 판각술은 마침내 거질 "고려대장경" 2회, "속장경" 1회등 모두
세차례의 조조를 가능하게 했다.
이중 "재조대장경"은 8만여의 경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간직
되고 있다.
목판인쇄보다 간편하게 책을 찍어낼수 있는 주자인쇄의 창안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13세기이전인 것은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고려정부가 개경에서 주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강화로 천도한
1239년에 그대로 뒤집어 새긴 책이 전래되고 있다.
무인정부의 일인자인 최이가 전란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간행한 이책은 새김이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천도이전의 주자인쇄에 대해서는 "상정예문"을 28부 찍어 각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다.
종래는 인출시기를 1234년(고종21)으로 여겨왔으나 이를 한정시킬만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고려주자에 있어 특기할 것은 중앙관서가 관장했던 주자인쇄술이 사찰에
까지 전파,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그 사주본중 청주교외의 흥덕사에서 1377년 주자로 인출한 "불조직지심체
요절"의 권하 1책이 전래되고 있다.
[[[ 조 선 ]]]
고려주자인쇄는 조선조로 계승되어 더욱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됐다.
태종이 1403년에 첫번째로 주조한 동활자가 계미자였다.
여말의 사주본보다는 개량되었지만 기술은 미숙한 편이었다.
활자인쇄 기술은 세종이 즉위하여 1420년에 두번째로 개주한 경자자에서
크게 개량되어 2단계의 발전을 보았고 세번째로 1434년 개주한 갑인자에서
그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다.
활자의 네모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조판용 동판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개조하였기 때문에 대나무만으로 빈틈을 메워 조판하여
인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갑인자가 유려하게 운필된 필서체라면 이때 만들어져 함께 사용된 한글
활자는 강직하게 직선으로 운필된 인서체인 것이 특징이다.
1447년에 인출된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1488년에 인출된
"동국정운"의 한글이 모두 고딕체의 한글활자로 정교하게 찍혀져 있다.
세계최초의 납활자인 병진자는 1436년에 만들어졌으며 1450년에는 경오자가
만들어졌다.
이와같이 세종조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던 활자인쇄는 세조 성종 중종을
거쳐 조선조말기까지 활기를 띠었으며 그간 헤아릴수 없는 숱한 종류의
활자가 만들어져 숭문정책의 촉진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민간에서도 활자를 만들어 일용제서를 비롯한 교육용자료 문집
전기등을 찍어 보급, 서민문화의 발전과 대중독서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
했다.
[[[ 근 대 ]]]
우리나라인쇄에 있어 근대는 1880년이후가 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신문화개화기라고 할수 있는 1883년에
근대화된 서양인쇄기계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성순보를 인쇄하기 위해 인쇄시설을 일본에서 수입해온 것.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근대인쇄문화발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을 이뤘다.
인쇄라기보다 탁본과 같은방식으로 찍어내던 고활자인쇄에서 탈피한
것이다.
우리나라인쇄문화는 정기간행물의 인쇄로 출발했으나 곧 도서출판으로
옮겨졌는데 1883년초에 설치된 광인사가 현대적인 최초의 출판사이다.
이보다 먼저 한성순보를 발행한 박문국에서도 도서출판을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출판은 광인사가 처음이라 할수 있다.
광인사에서 출판된 책으로는 1884년 발행된 "충효경집주합벽"을 비롯 85년
"만국정표" "농정신편", 86년 "농정섭요"등이 있다.
보다 활발하게 대중계몽을 위한 출판은 1885년 서울정동에 설치되어
천주교관련도서를 발행한 천주교인쇄소와 89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올링거목사가 배재학당안에 설치한 활판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구한말까지 인쇄계에서 기술혁신을 이룬 곳은 한국정부의 용산인쇄국이다.
1909년12월에 "활판술"이라는 교과서를 한국인과 일본인을 위해 따로
출판했을 정도.
활자개량과 함께 색도인쇄에도 힘을 기울여 정부인쇄물의 질을 높이고
우표를 인쇄했다.
육당 최남선이 1906년에 설치한 신문관에서는 "소년" "청춘"등 잡지출판에
힘쓰는 한편 육당자신의 저서등 독립정신고취에 필요한 내용의 책을 출판
했다.
신문관에 이어 일찍부터 인쇄업에 투신한 선각자는 김진환이다.
1912년 서린동에 보진재석판인쇄소를 차렸다.
보진재는 염가인쇄보다는 고급인쇄, 즉 인쇄기술의 향상으로 출판물의 질을
높여 인쇄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한글폐지로 한글활자사용이 어렵게 되어
8.15광복을 맞아서는 한글표기의 책을 출판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신재섭기자>
''문화의 바탕을 정신''이라고 한다면 우리민족문화의 바탕은 바로 인쇄문화
에서 비롯됐다고 할수 있다.
인쇄문화에 관한한 세계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갖는 까닭이다.
지난 66년 불국사석가탑 사리함속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타라니경''(751년.
경덕왕10년)은 목판인쇄물로서는 세계최초의 것이다.
개방화 국제화시대를 맞아 한국인쇄문화의 창달과 발전을 향한 지향적 좌표
설정을 위해 우리가 걸어온 인쇄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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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려 ]]]
신라말기의 인쇄문화는 고려로 접어들자 사찰에 의해 계승, 발달됐다.
고려초인 1007년 개성의 총지사가 간행한 "보협인타라니경"은 이보다 앞서
간행된 중국의 오월판에 비해 그 판각술이 우수하고 판화 또한 실감있게
새겨졌다.
이같은 판각술은 마침내 거질 "고려대장경" 2회, "속장경" 1회등 모두
세차례의 조조를 가능하게 했다.
이중 "재조대장경"은 8만여의 경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간직
되고 있다.
목판인쇄보다 간편하게 책을 찍어낼수 있는 주자인쇄의 창안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13세기이전인 것은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고려정부가 개경에서 주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강화로 천도한
1239년에 그대로 뒤집어 새긴 책이 전래되고 있다.
무인정부의 일인자인 최이가 전란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간행한 이책은 새김이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천도이전의 주자인쇄에 대해서는 "상정예문"을 28부 찍어 각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다.
종래는 인출시기를 1234년(고종21)으로 여겨왔으나 이를 한정시킬만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고려주자에 있어 특기할 것은 중앙관서가 관장했던 주자인쇄술이 사찰에
까지 전파,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그 사주본중 청주교외의 흥덕사에서 1377년 주자로 인출한 "불조직지심체
요절"의 권하 1책이 전래되고 있다.
[[[ 조 선 ]]]
고려주자인쇄는 조선조로 계승되어 더욱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됐다.
태종이 1403년에 첫번째로 주조한 동활자가 계미자였다.
여말의 사주본보다는 개량되었지만 기술은 미숙한 편이었다.
활자인쇄 기술은 세종이 즉위하여 1420년에 두번째로 개주한 경자자에서
크게 개량되어 2단계의 발전을 보았고 세번째로 1434년 개주한 갑인자에서
그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다.
활자의 네모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조판용 동판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개조하였기 때문에 대나무만으로 빈틈을 메워 조판하여
인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갑인자가 유려하게 운필된 필서체라면 이때 만들어져 함께 사용된 한글
활자는 강직하게 직선으로 운필된 인서체인 것이 특징이다.
1447년에 인출된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1488년에 인출된
"동국정운"의 한글이 모두 고딕체의 한글활자로 정교하게 찍혀져 있다.
세계최초의 납활자인 병진자는 1436년에 만들어졌으며 1450년에는 경오자가
만들어졌다.
이와같이 세종조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던 활자인쇄는 세조 성종 중종을
거쳐 조선조말기까지 활기를 띠었으며 그간 헤아릴수 없는 숱한 종류의
활자가 만들어져 숭문정책의 촉진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민간에서도 활자를 만들어 일용제서를 비롯한 교육용자료 문집
전기등을 찍어 보급, 서민문화의 발전과 대중독서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
했다.
[[[ 근 대 ]]]
우리나라인쇄에 있어 근대는 1880년이후가 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신문화개화기라고 할수 있는 1883년에
근대화된 서양인쇄기계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성순보를 인쇄하기 위해 인쇄시설을 일본에서 수입해온 것.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근대인쇄문화발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을 이뤘다.
인쇄라기보다 탁본과 같은방식으로 찍어내던 고활자인쇄에서 탈피한
것이다.
우리나라인쇄문화는 정기간행물의 인쇄로 출발했으나 곧 도서출판으로
옮겨졌는데 1883년초에 설치된 광인사가 현대적인 최초의 출판사이다.
이보다 먼저 한성순보를 발행한 박문국에서도 도서출판을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출판은 광인사가 처음이라 할수 있다.
광인사에서 출판된 책으로는 1884년 발행된 "충효경집주합벽"을 비롯 85년
"만국정표" "농정신편", 86년 "농정섭요"등이 있다.
보다 활발하게 대중계몽을 위한 출판은 1885년 서울정동에 설치되어
천주교관련도서를 발행한 천주교인쇄소와 89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올링거목사가 배재학당안에 설치한 활판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구한말까지 인쇄계에서 기술혁신을 이룬 곳은 한국정부의 용산인쇄국이다.
1909년12월에 "활판술"이라는 교과서를 한국인과 일본인을 위해 따로
출판했을 정도.
활자개량과 함께 색도인쇄에도 힘을 기울여 정부인쇄물의 질을 높이고
우표를 인쇄했다.
육당 최남선이 1906년에 설치한 신문관에서는 "소년" "청춘"등 잡지출판에
힘쓰는 한편 육당자신의 저서등 독립정신고취에 필요한 내용의 책을 출판
했다.
신문관에 이어 일찍부터 인쇄업에 투신한 선각자는 김진환이다.
1912년 서린동에 보진재석판인쇄소를 차렸다.
보진재는 염가인쇄보다는 고급인쇄, 즉 인쇄기술의 향상으로 출판물의 질을
높여 인쇄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한글폐지로 한글활자사용이 어렵게 되어
8.15광복을 맞아서는 한글표기의 책을 출판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신재섭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