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당에 들어간 것은 여섯살때.

그때 글자를 깨쳐나가자 기뻐하시던 어머님과 아버님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

천자문 명심보감 동몽선습같은 책들을 하나씩 뗄때마다 서당에서는
"책걸이"라는 의식을 진행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님은 기쁜 마음으로 떡을
해와 잠시라도 한눈을 팔라치면 여지없이 종아리에 회초리를 갖다 대던
훈장님과 내 어린 친구들의 배고픔을 씻어주었다.

이렇듯 서당공부에 열중했던 내 나이 여덟살 나던해 6월 어느날 허겁지겁
군청 소사(잔심부름을 하던 젊은사람)가 달려왔다.

아버님이 빨리 나를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짚신에 미영베웃(면화옷의 전라도사투리)
을 입고, 소사와 함께 버선발을 망쳐가며 서둘러 군청으로 뛰어갔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군청에 당도해보니 아버님은 "너도 이젠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니 서당
공부는 그만하고 학교에 입학해야겠다"고 하시며 날 학교로 데려가셨다.

그때가 입학식을 치룬지 이미 두달이 지난 때였다.

아마도 아버님이 군청에서 교육예산 관계 일을 보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듯
늦은 입학이 가능했을 것이다.

뒤늦게 보통학교 1학년에 들어가고 보니 어리둥절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제일 작고 나이 어린 속이었다.

같은 반에는 마을에서 서당공부를 마치고 뒤늦게 입학한 학생들이
많았는데, 심지어 내나이 만한 아들을 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나는 잘도 어울렸다.

그당시 영광에는 유독 학식없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운동이 어느 소읍보다도
활발했다.

당시 덕망있는 많은 어른들이 일제에 반대하는 사회활동을 이끌었는데
심지어는 내가 다니고 있던 보통학교에까지 당시 김준연씨가 당수로 있던
M-L당 학생당원이 있었다.

그이가 문은종이라는 사람인데 후에 어느 책을 들춰보다가 나는 그이가
전쟁직후 이북으로 넘어갔고, "전평"이라는 단체의 사무국장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한가지는 그때 마악 보통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학교에서 열렸던 학예회에 대한 것이다.

그때 학교 저학년들이 공연하는 짧은 단막극에 내가 주연으로 뽑혀 무대
에서의 공연이 끝난뒤 박수갈채를 받았던적이 있다.

모든 학과가 일본어였고 딱 한가지 조선어과목을 배웠는데 우리말보다는
한자가 70%는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젖먹던 때부터 배운 우리말을 잊을수가 있겠는가.

일본인교사 앞에서는 일본말을 썼지만 집에서나 친구들끼리는 여전히
우리말을 썼다.

아직 학교에 일본인 교사의 수가 적은 탓이었다.

보통학교 고학년에 올라가서 학교내에 있는 소년동맹에 가입을 해서
활동했다.

소년동맹뿐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단체가 표면상으로는 친목이 목적
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반목사상의 고취가 그 목적이었다.

소년동맹 바로 위에 청년동맹이 있었고, 그 위에 어른들이 하는 신간회가
있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사회활동이 활발했던 영광이었기에 이런 단체들이
읍내 어디를 가나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무렵 아이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나야 아버님이 군청에 계신 덕으로 그런대로 어려움없는 생활을 할수
있었지만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를 못해 얼굴에 누렇게 부황뜬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짚신 차림이었고 읍내에서 최고로 부자로
사는 집 아이라야 겨우 고무신 한켤레를 얻어신을 정도였다.

이런 내 보통학교 5학년때 평온하던 우리 집에 뜻하지 않던 변고가 생겼다.

아버지께서 다니시던 군청을 그만두게 된것이다.

부친의 월급에 의지해 살던 집안 살림은 일시애 힘들어졌다.

그 당시 보통학교 한달 월사금(수업료)이 40전 정도였는데 언젠가는 내가
그걸 못내서 학교에서 쫓겨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