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제지 이연희자금부장은 지난 81년 입사했다. 올해로 꼭 14년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경력이지만 그의 이력서는 매우 간단하다.
입사이래 지금까지 줄곳 자금만 담당해온 탓이다.

이부장의 14년사는 "기업 자금파트"의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단
조직이 커졌다. 입사당시 경리과의 자금계계에 불과하던것이 자금과를
거쳐 지금은 부로 독립됐다. 인원도 16명이나 된다.

조직못지 않는 게 기능의 변화. 과거엔 "은행대출"이 자금부의 주요
기능이었다. 투자규모가 작아 은행대출만 해결되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조달방법이 다양해지고 우선 순위가 달라졌다.

"100의 자금을 조달할 경우 해외부문에서 10-15%, 회사채 유상증자 등
직접금융(리스포함) 50%,산업은행설비자금 10-15%정도로 채웁니다. 일반
은행대출은 10% 안팎에 불과하다"(이부장)

기업규모가 커지면서 자금을 양이 아니라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값싼
자금을 확보하냐는 질의 문제가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나온게 자금기획. 기업 자금맨들의 일은 국내은행 창구를 뛰어
다니는게 아니라 아이디어를 짜내고 외국 증권사나 정부기관을 찾아
새상품을 논의하는 것으로 변했다.

한솔은 "자금기획"을 통해 올해 새기록 3개를 만들어냈다.

첫째는 지난 5월20일 런던에서 발행한 "신주인수권부 변동금리채(NEW)".

신주인수권부사채(BW)는 원래 고정금리이나 한솔이 발행할 무렵 금리가
오르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당연히 변동금리를 원했다.

그래서 변동금리를 고정금리와 교환하면서 만기에 고정금리를 일시 지급
하는 신금융기법인 "제로쿠폰 스와프"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렇게
만들어진게 NEW이다.

둘째는 조만간 국내에서 첫 발행계획인 FRN(변동금리부채권).

지난 1월 발행을 시도했으나 규정이 없었다. 재무부와의 협의를 거쳐
규정을 만들고 발행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셋째는 전환사채(CB)붐.

기관투자가들에 대한 홍보에 적극 나서 올 상반기 증시의 CB붐을 일으켜
표면금리를 연1%로까지 낮췄다.

"기업 자금부에서 하는 일은 이제 "자금관리"가 아니라 "자금영업"입니다.
하나의 독립적인 금융기관, 그것도 종합금융기관이지요. 자금파트에서
"영업"을 어떻게 하느냐가 회사수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부장은 힘주어 말한다.

건설회사나 종합상사쪽으로 가면 자금파트가 "독립된 금융기관"으로서
갖는 비중은 더 커진다.

해외건설의 경우 중동경기가 한창때는 공사를 수주하는 즉시 25%의
선수금을 받기도 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공사발주조건에 금융이 따라
붙는다.

"최근 들어선 건설회사가 금융을 일으켜 자금을 조달하는 조건으로
공사를 수주하는게 당연시되는 추세입니다. 금융능력이 바로 건설회사의
영업력이 되는 셈이지요"(현대그룹 재무관리팀 강연재부장)

대형프로젝트가 많은 선박회사나 종합상사들도 마찬가지다. 자금팀이
금융기관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면 나머지 부문도 맥을 못쓴다는 얘기이다.

중소기업들도 더이상 소극적이지 않다. 과감하게 해외증권을 발행하기도
한다. 올들어 동제품을 생산하는 대창공업(자본금 1백70억원)과 위성방송
수신기를 만드는 대륭정밀(자본금 1백5억원)이 중소기업체들 중에선
처음으로 해외전환사채(CB)를 각각 1천5백만달러가량씩 발행했다.

기업자금맨들의 능력도 일반 금융기관보다 뒤지지 않는다.

"은행원들을 보면 좀 안타까와요. 허구한날 찾아와 "예금달라, 외환거래
좀 해달라"는 말뿐이예요. 우리는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사람들을 만나
해외금융시장 동향과 국내 금융구조개선방향을 얘기하는데." 대기업
자금담당들의 얘기다.

"5년전만해도 우리가 기업에 가서 많은 얘길 해줬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수 배워옵니다" 이들을 상대하는 은행원들의 고백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선 대기업들의 신용도를 국내 주요은행들의 신용도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친다.

삼성전자가 지난 6월 리보(런던은행간금리)에 0.3%를 더한 금리로 FRN
(변동금리채권)을 발행했는데 두달뒤인 8월 한일은행이 삼성전자와
똑같은 조건으로 FRN을 발행해야만 했다.

포항제철 등 일부기업들은 뉴욕증권시장에 직접 상장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은행들로선 "언감생심"이다.

물론 국내 기업들의 자금영업은 크게보면 아직 조달단계에 불과하다.
도요타은행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조엔의 자금을 금융시장에서 굴리는
일본 도요타자동차수준을 따라잡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도요타에서 결정하는 금리는 일반은행들의 금리에 즉각 영향을 줘
"도요타레이트"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조만간 할부금융회사가 설립되면 조달은 물론 운용까지를 포함한
"기업의 은행화"는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소비자금융의 꽃이라고 할수 있는 할부금융을 전담하는 할부금융회사들은
돈의 흐름을 진짜 금융권을 소외시킨 "소비자와 기업틀" 안으로 묶어 버릴
것이다. 할부금융회사 자체가 "작은 은행"노릇을 하게되는 셈이다.

현대 럭금 대우 쌍용 기아 코오롱 동양등 주요 그룹들이 이미 자본금
50-100억규모의 할부금융사를 세워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 씨티은행은 장기경영전략을 세울때 더이상 은행을 경쟁대상로 삼지
않는다. "각분야에서 잘나가고 있는 일반 기업들을 경쟁상대로 놓고
전략을 세우지요"(시티은행 서울지점 도기권지배인). 은행과 기업의
역학관계를 다시한번 생각케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