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아버님의 실직뒤 일이다.

그래도 효자가문의 체통만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던 어머님의 이 무렵
노고는 한마디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별반 하는 일없이 소일하시던 아버님을 대신해 어머님은 마포베를 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집안 형편이 이랬으니 그해 6학년이 되어서 당연히 가야할 수학여행비
20전을 낼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밤낮으로 마포베를 짜, 겨우 목포 왕복할 차비를 마련
하셨다.

수학여행비에 숙박비 식대가 포함되는데 그것까지는 장만을 못하신 것이다.

그리곤 선생님께 통사정을 해 목포에 친척집이 있으니까 먹고 자는 것은
그집으로 가 해결하게 해달라고 해서 겨우 수학여행을 떠날수 있었다.

때마침 목포에서는 요즈음의 박람회라 할 "공진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걸
보기 위해서는 끼니도 제대로 못먹은 채 밤 12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학다리역까지의 기차시간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곳 영광 읍내에서 학다리역까지가 70리 길.

어린 나는 먹은 것이 허했던 터라 배가 고프고 머리가 어지러워 도저히
길을 걸을수가 없었다.

그때 한 친구는 지금도 그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다.

조기택이라는 친구였다.

그때 그러니까 나와 친구들 일행이 길을 걷다가 도중에 어떤 우물가에서
목을 축이며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있었다.

때마침 내 허기진 표정을 줄곧 안타깝게 지켜보던 그 친구는 자신이 싸온
누룽지를 나눠줬다.

그가 먹을것도 모자랐을텐데 선뜻 자신의 몫을 나눠준 그 친구가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었다.

그걸 먹은 후로는 실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학다리로 가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타봤고 자동차와 사람들, 항구에
드나드는 집채만한 배들로 붐비는 목포라는 대처를 구경했고 무엇보다도
기쁜일은 당시 열렸던 공진회를 구경했던 일이었다.

소읍의 어린 서생인 나에게는 그곳에 전시된 모두가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꼭 그런 신기한 것들을 만드는 큰 회사의 사장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무렵 부친은 당시 읍내에 새로 생긴 "영법전기회사"에 다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영법전기회사(당시 조희경옹이 사장이었음)는 본사를 읍내 거리에 두고
발전소는 단주리에 두고 영광 일원에 전력을 공급하는 회사였다.

그래도 아버님께서 군청을 그만두신뒤 가뜩이나 일자리가 귀했던 영광읍내
에서 쉽사리 일자리를 구할수 있었던 것은 그때만 하더라도 영광 읍내에서
아버님만큼 수리에 밝고 사무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줄곧 사무일을 봐오던 당신이기에 필재는 물론 일본어 또한 능통하셨다.

젊은 시절부터 일했던 군청에서의 사무경력이 톡톡히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안 살림은 비로소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님께선 영법전기회사의 일도 그렇게 오래 하실수 없었다.

요즈음 대기업의 중소기업 합병처럼 당시 대도시에 있던 전기회사들은
호시탐탐 군소지역의 전기업체들을 합병하려고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법전기회사를 합병하기 위해 두개의 회사가 달려들었다.

대구에 본사를 두고 광주의 전력공급권을 갖고 있던 대흥전기회사와 목포의
전력공급권을 갖고 있던 목포전등회사가 그들이었다.

이무렵 주요 간부였던 아버님은 어느 한편을 들지 않을수 없었는데 무슨
연유에선지 목포전등회사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였다.

대흥전기회사가 영법전기회사를 흡수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반대쪽 편을
들어서 미운털이 박힌 아버님은 다시 일자리를 잃게된 것이다.

다행히 아버님과 함께 목포전등회사편을 들었던 일본인 구아상무가 목포
전등회사로 찾아가 "그 사람은 당신들 편을 들다가 자리를 잃었으니 당신들
이 써 주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부탁을 해 쉽게 자리를
옮겨가실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