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메이지 연호로는 6년10월에 일어난 태정관의 대대적인 사퇴소동을
일본의 역사는 "정한론 정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한론 정변은 결과적으로 무혈 대숙청인 셈이었다.

정쟁에서 패한 정한파가 대대적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제발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후일에 메이지유신의 삼대 원훈으로 추앙받게 된 사람은 이와쿠라와
사이고, 오쿠보였는데 세사람 가운데서 사이고다카모리는 그 정쟁에서
권력의 중앙 무대에서 미끄러져 퇴장을 하고만 것이었다.

사이고가 낙향하자 누구보다도 속이 후련한 것은 오쿠보였다.

실상 그 정변은 사이고와 우쿠보의 대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국을 정벌하느냐 않느냐, 우선 사이고를 특사로 파견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밀고당기는 안건이었지만 기실은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하는 권력투쟁이었던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이긴 오쿠보는 이제 천하가 자기의 손아귀 속에 든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한번 웅지를 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구미 시찰중 가장 인상 깊었던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였다.

힘이 곧 정의며, 약육강식이 국제정치의 기본 틀이니 일본도 동양에서
먹히는 나라가 아닌 먹는 나라가 되라던 전제정치가.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와 쇠, 즉 무기, 그리고 뜨거운 피, 즉 충성
스러운 군대 세가지를 다 잘 갖추어야 한다던 철혈재상.

강력한 정치란 곧 내리누르는 정치며 내리누르기 위해서는 막강한 경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던 비스마르크..

"나는 일본의 비스마르크가 되리라"

오쿠보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넣었다.

비스마르크가 되기 위해서는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자기를 떠받쳐
주고 밀어줄 절대적으로 신임할수 있는, 오른팔 왼팔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는 것을 오쿠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으로 그는 오쿠마시게노부와 이토히로부미를 택했다.

오쿠마는 자기가 구미사절단으로 떠날때 태정관에 잔류시켜 놓았던 사람
으로 그때부터 남다른 사이였고, 이토는 서양 여행중에 사람됨이 장차의
정치가로 안성맞춤인 것 같고 자기를 고분고분 따르기도 해서 각별히 점을
찍어둔 사람이었다.

오쿠보는 그 두 사람을 어느날 밤 자기 집에 초대했다.

술상을 가운데 놓고 잔을 나누며 오쿠보는 두 사람에게 자기의 오른팔
왼팔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고 그들은 힘 있는데까지 보좌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말하자면 삼인의 정치적인 혈맹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