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는 봉원개발. 여성의류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이다. 이 회사는 지난 88년 인건비상승을 이겨내기 위해 자마이카에
의류제조공장을 차렸다.

정희철사장은 이때 수출입은행의 해외투자지원자금을 이용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화35만달러를 빌렸지만 그때 일은 지금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대출절차가 워낙 까다롭고 긴데다 말단직원들까지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데 너무나 놀랐던 것이다.

자마이카사업이 호조를 보이자 정사장은 올초 시설확장을 계획했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 주거래은행을 찾았으나 시간이 걸릴것 같았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할 수없이 안면이 있는 수출입은행을 다시 찾았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사장이 찾은 수출입은행은 과거와는 달랐다. 처음 상담할 때와
서류를 낼 때,그리고 돈을 타러 갈 때 꼭 3번만 은행에 들러 1백만달러를
빌릴수 있었다.

그것도 1주일만에. 금리도 리보에 0.5%를 더한 비교적 양호한 수준
이었다. 돈을 빌려가면서 정사장이 담당직원에게 한 질문은 이런 변화를
실감케 한다.

"수출입은행이 언제 민영화되었습니까"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이 "민영화"
된 은행처럼 영업을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과거엔 금리가 싼 정책금융(연불수출자금.해외투자지원자금)을 독점공급
했다. 하지만 이젠 연불수출의 경우 외국 은행들과, 해외투자지원자금은
국내은행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탓이다.

"입행 21년만에 처음으로 한손에 지도와 한손에 대출신청구비서류를 들고
기업체를 찾아갔다"(황기현산업설비금융1부차장)는 투의 얘긴 이제
수은직원들 사이에선 더이상 생소하지 않다.

국책은행들에 "권위"를 안겨다준 정책자금들이 사라지면서 국책은행원들도
더이상 앉아서 고객을 맞을 수 없게 됐다.

국책은행의 영업무대가 "은밀한 장막"속이 아니라 "공개된 시장"으로
바뀐 것이다. 출발선이 시중은행들과 동일한 만큼 더 빨리 뛰지 않으면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중소기업은행은 아예 국책은행에선 처음으로 섭외전담요원제도를 도입
했다. 다른 일 없이 하루종일 섭외만 하며 뛰는게 업인 직원이 각
지점에 3명(차장 대리 행원 각 1명)씩 있다.

전국 지점 2백35개와 93개의 출장소를 합하면 섭외요원은 1천명에
이른다. 전체 행원의 10%가 구두창이 닳도록 섭외전선에서 뛰는 것이다.

"하루 평균 30-40개 업체는 다닙니다. 남보다 한시간 일찍 출근하는데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다 보면 퇴근시간이란 아예 없어요. 기존 고객의 이탈을
막고 신규고객을 찾아 하루종일 걷고 또 걷습니다. 보험회사 영업사원이
우리를 보고 지독하다고 할 겁니다" 섭외전담요원인 이 은행 노원지점
윤상국대리의 말이다.

국책은행들은 이제 몸으로 때우는 것에서 끝내지 않는다. 내부조직도
한발앞서 바꾸고 돈드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다.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선
가능한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

국민은행은 올초 조직개편에서 은행권에선 생소한 "마케팅부"를 본점에
신설했다. 지역본부에 마케팅팀장을 두고 지점마다 마케팅담당자를 뒀다.

제조업체에서 판매기획을 총괄하는 의미의 마케팅부서는 금융권에선
2,3년전 한두개 투금사들이 도입했을뿐이다. 섭외능력강화를 위한
노력이다.

물론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 매년 해오던 경영자들에 대한 해외연수를
올해는 생산직 근로자들에게도 확대했다.

지난 6월 7일부터 16일까지 정밀기계가공업체에서 근무하는 근로자 15명을
1차로 독일에 연수시켰고 이달 중순과 말에 전기전자업체근로자와 섬유화학
업종근로자 각각 15명씩을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등에 연수보낼 계획이다.
해외연수를 한번 갔다오면 상당기간은 고객으로 남아있는다는 계산이다.

일반 기업들 사이에 가장 권위주의적인 은행으로 인식되어있는
산업은행도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아 의식(Attitude)행동규범(Norm)
금융서비스(Service)의 총체적개혁(Total Reform)을 촉진하는 "TRANS
2000새바람운동" 을 벌이고 있다.

근무시간을 잘 지키는 데서부터 직원들의 의식과 행동을 "고객중심"으로
전환토록 하는 이 운동을 통해 산은은 제2의 창업을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한마디로 산은의 "TRANS"운동은 "변화하는 금융현실"과 "변화하지 않는
의식"사이의 타임래그를 가능한한 빨리 좁혀보겠다는 뜻일게다.

정책자금이라는 가나안의 젓줄이 끊긴 지금 "준시중은행"으로서의
국책은행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키위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다.

은행의 경쟁력은 뭘까. 최근 원스톱서비스를 위해 은행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창구를 없애는등 "첨단형"으로 꾸미고 직원들도 모든 업무를 다
아는 종합금융맨으로 무장시켜 화제가 되고있는 제일은행 무역센터지점
조명암지점장의 말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우리는 고객의 요구에 최선을 대해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객들은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요. 시장의 변화와 고객의 욕구를 맞추지
못하면 살아남을 금융기관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