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인신위조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국에서 사인 관인등 나무나 돌 쇠붙이에 글자를 새겨 신빙의 증거로
삼는 인신의 제도가 정비,확립된 것은 조선조 태종때였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엄격해서 신제도의 문란은 나라의 기반을 뒤흔드는
중죄로 간주돼 인신을 위조해 허위공문서를 만드는 자는 무조건 목을
베었다.
"인신을 위조한 자는 그것이 비록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참형에 처하며 그
처자는 여러읍의 노비로 영속시킨다"는 율이 "경국대전"의 형전 첫머리,
위폐범을 교수형에 처하도록한 조항 앞에 나와 있는 것만 보아도 옛 사람들
은 그것을 가장 큰 죄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래서 시정잡배도 감히 인신위조는 꿈도 꾸지 못했다.
성종13년(1482)의 일이다.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던 신정이 자신의 신변호보를 위해 나라에게
배치시켜 주는 수종 3명의 임명장을 위조한 사건이 발각됐다.
스스로 글을쓰고 병조의 관인과 병조당상관및 낭청의 수결까지 위조한
이 사건의 장본인이 신정이었다는 사실이 사헌부에서 밝혀지자 성종은
당혹하지 않을수 없었다.
신정은 조선조의 원훈인 고령군 신숙주의 아들 여덟명중 네째였다.
그는 게다가 승지와 이조참의까지 지낸 공신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한명회 정창손등이 원훈의 후예인 공신은 죽일수 없다는
것을 내세워 반대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해 버리고 "신숙주가 살아
있었다면 애석해 하지 않고 먼저 죽이기를 청했을 것"이라며 사약을 내려
신정을 사사하고 그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금고 어명을 내렸다.
태평성대를 이끌어간 성종의 결단이었다.
인천시의 세무직공무원들이 은행의 인장을 위조해 가짜영수증을 만들어
거액의 세금을 도적질한 사건이 들통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들은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는 현정부의 개혁의지를 무색케
하고 있다.
이들이 가난에 못이겨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들려줄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광해군때의 권신 이이첨은 젊었을 때 촉망받은 선비였으나 집안이 가난해
아내가 벽에 붙은 흙을 뜯어 풀기를 핥아 먹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어
광해군의 폭정을 도왔다.
부와 귀를 한꺼번에 얻었으나 인조반정때 참수를 당하면서 그는 옆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배고품을 조금만 참을 걸..."
의아닌 부는 뜬 구름같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두 토막의 이야기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5일자).
삼는 인신의 제도가 정비,확립된 것은 조선조 태종때였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엄격해서 신제도의 문란은 나라의 기반을 뒤흔드는
중죄로 간주돼 인신을 위조해 허위공문서를 만드는 자는 무조건 목을
베었다.
"인신을 위조한 자는 그것이 비록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참형에 처하며 그
처자는 여러읍의 노비로 영속시킨다"는 율이 "경국대전"의 형전 첫머리,
위폐범을 교수형에 처하도록한 조항 앞에 나와 있는 것만 보아도 옛 사람들
은 그것을 가장 큰 죄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래서 시정잡배도 감히 인신위조는 꿈도 꾸지 못했다.
성종13년(1482)의 일이다.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던 신정이 자신의 신변호보를 위해 나라에게
배치시켜 주는 수종 3명의 임명장을 위조한 사건이 발각됐다.
스스로 글을쓰고 병조의 관인과 병조당상관및 낭청의 수결까지 위조한
이 사건의 장본인이 신정이었다는 사실이 사헌부에서 밝혀지자 성종은
당혹하지 않을수 없었다.
신정은 조선조의 원훈인 고령군 신숙주의 아들 여덟명중 네째였다.
그는 게다가 승지와 이조참의까지 지낸 공신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한명회 정창손등이 원훈의 후예인 공신은 죽일수 없다는
것을 내세워 반대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해 버리고 "신숙주가 살아
있었다면 애석해 하지 않고 먼저 죽이기를 청했을 것"이라며 사약을 내려
신정을 사사하고 그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금고 어명을 내렸다.
태평성대를 이끌어간 성종의 결단이었다.
인천시의 세무직공무원들이 은행의 인장을 위조해 가짜영수증을 만들어
거액의 세금을 도적질한 사건이 들통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들은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는 현정부의 개혁의지를 무색케
하고 있다.
이들이 가난에 못이겨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들려줄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광해군때의 권신 이이첨은 젊었을 때 촉망받은 선비였으나 집안이 가난해
아내가 벽에 붙은 흙을 뜯어 풀기를 핥아 먹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어
광해군의 폭정을 도왔다.
부와 귀를 한꺼번에 얻었으나 인조반정때 참수를 당하면서 그는 옆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배고품을 조금만 참을 걸..."
의아닌 부는 뜬 구름같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두 토막의 이야기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