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587) 제3부 정한론 : 반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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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굴러떨어지듯 한 이와쿠라는 정신없이 고개아래로 도망을 쳤다.
마차에 뛰어올라 칼을 휘둘렀던 자객이 뒤따라 뛰어내려 쫓아가자 경호원
한사람이 재빨리 대검을 왼손으로 옮기고 허리에서 육혈포를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윽!" 자객은 벌렁 뒤로 넘어졌다.
총소리가 울리자 자객들은 모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탕! 또 한방이 터지자 자객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모조리 숲속으로
냅다 몸을 날렸다.
결국 자객들의 이와쿠라 습격은 그의 한쪽 어깨에 가벼운 상처를 냈을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애꿎은 마부와 자객 한사람이 희생되었을 뿐이었다.
정한론 정변으로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 중신들이 퇴진을 한 뒤로
도쿄시내에 곧잘 불온한 벽보가 나붙었다.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제 명대로 못살 것이다, 정의의 칼이 두 여우의
목을 향해 번뜩이고 있다, 멀지않아 태정관이 핏빛으로 물들고 말리라
등등 암살과 거사를 암시하며 민심을 흉흉하게 휘저어대는 내용이었다.
경시청에서는 그런 벽보를 붙이는 불순분자의 색출에 힘쓰면서 한편
이와쿠라와 오쿠보를 비롯한 중신들의 경호를 한층 강화한 터였다.
그런데 자객들의 습격사건이,그것도 백주에 일어났으니 대경시인
가와지가 뿔다귀가 서지 않을수 없었다.
오쿠보는 그 보고를 받자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대뜸 가와지를 호출하여
엄한 어조로 책임추궁을 한 다음 범인들을 조속한 시일내에 반드시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혼자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암살금지령이 내린지가 언젠데,지금도 그따위 고약한 수작을 부리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군"
그 말에 가와지는 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눌러 참고, "글쎄 말입니다.
암살은 구시대의 유물인데,새로운 개명시대가 됐는데도 여전히 그런
천인공노할 수법을 쓰다니 정말 한심한 노릇입니다" 하고 알랑방귀를
뀌었다.
왕정복고를 이룩한 유신정부는 그 첫 법령으로 "암살금지령"이라는 것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1868년, 그러니까 메이지 1년의 일이었다.
암살이 다반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린 고육지책이었다. 그런 법령이
효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에도가 탄 기선이 고베항에 도착한 것은 이틀뒤였다. 배가 선창에 닿자,
칼을 찬 순사 두사람이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올라왔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7일자).
마차에 뛰어올라 칼을 휘둘렀던 자객이 뒤따라 뛰어내려 쫓아가자 경호원
한사람이 재빨리 대검을 왼손으로 옮기고 허리에서 육혈포를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윽!" 자객은 벌렁 뒤로 넘어졌다.
총소리가 울리자 자객들은 모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탕! 또 한방이 터지자 자객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모조리 숲속으로
냅다 몸을 날렸다.
결국 자객들의 이와쿠라 습격은 그의 한쪽 어깨에 가벼운 상처를 냈을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애꿎은 마부와 자객 한사람이 희생되었을 뿐이었다.
정한론 정변으로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 중신들이 퇴진을 한 뒤로
도쿄시내에 곧잘 불온한 벽보가 나붙었다.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제 명대로 못살 것이다, 정의의 칼이 두 여우의
목을 향해 번뜩이고 있다, 멀지않아 태정관이 핏빛으로 물들고 말리라
등등 암살과 거사를 암시하며 민심을 흉흉하게 휘저어대는 내용이었다.
경시청에서는 그런 벽보를 붙이는 불순분자의 색출에 힘쓰면서 한편
이와쿠라와 오쿠보를 비롯한 중신들의 경호를 한층 강화한 터였다.
그런데 자객들의 습격사건이,그것도 백주에 일어났으니 대경시인
가와지가 뿔다귀가 서지 않을수 없었다.
오쿠보는 그 보고를 받자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대뜸 가와지를 호출하여
엄한 어조로 책임추궁을 한 다음 범인들을 조속한 시일내에 반드시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혼자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암살금지령이 내린지가 언젠데,지금도 그따위 고약한 수작을 부리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군"
그 말에 가와지는 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눌러 참고, "글쎄 말입니다.
암살은 구시대의 유물인데,새로운 개명시대가 됐는데도 여전히 그런
천인공노할 수법을 쓰다니 정말 한심한 노릇입니다" 하고 알랑방귀를
뀌었다.
왕정복고를 이룩한 유신정부는 그 첫 법령으로 "암살금지령"이라는 것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1868년, 그러니까 메이지 1년의 일이었다.
암살이 다반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린 고육지책이었다. 그런 법령이
효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에도가 탄 기선이 고베항에 도착한 것은 이틀뒤였다. 배가 선창에 닿자,
칼을 찬 순사 두사람이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올라왔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