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209) 김준형 행남자기회장 (11)..기술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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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한지 3~4년동안 이렇게 착실히 자기제품을 생산해내자 행남사는 차츰
자기제조 기술수준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일례로 창업직후 현목포 서부국민학교옆에 일인부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매일처럼 공장에 찾아와 우리 그릇을 얻어가려고 안달이었다.
그들은 당시 밤색 플라스틱 식기로 밥을 먹었는데 날마다 한명씩 찾아와
정문앞에서 절을 넙죽하고는 자기네 밥그릇에서 냄새가 난다고 우리 사기
그릇을 달라고 청했다.
행남사의 기술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것은 바로 삼척에 있는 "삼정
유지주식회사"에 애자를 만들어 공급했던 일이었다.
"삼정유지"는 당시 일본인 소유의 큰 비누제조공장이었는데 중요한 부속품
으로 폭 1m정도의 대형 절연 애자가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자가 그만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전시라 일본에서 제품을 만들어 실어오는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형편
이었다.
다급해진 그들은 부산의 "대한도기" 여주의 "조선도기" 두 자기공장에
애자를 만들어 줄것을 부탁했지만 어디에서도 선뜻 애자를 만들어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그토록 큰 애자를 완벽하게 절연효과를 내도록 만들수 있는 기술이
모자랐던 까닭이었다.
내게 그 애자 공급의뢰가 들어온 것이 45년5월경.
즉석에서 나는 만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달동안의 작업끝에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줬다.
그러자 그들은 대단히 만족해하며 나를 서울반도호텔로 초청해 융숭한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7월에 목포로 예기치않은 손님 두명이 찾아왔다.
총독부 직원이라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일전에 내가 서울에서 삼정유지 간부들을 만나 자기공장을
하는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었는데 애자를 만들어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던 그들이 총독부에 "행남사가 애로사항이 많다는데 좀 들어주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총독부 직원들은 내게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줄테니 말하라고
했다.
나는 "이북에서 구석과 점토를 실어와야 하는데 화차를 배정받기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전쟁으로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이 도와주기는 뭘 도와
준다는 말인가"고 한동안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8월1일 느닷없이 총독부로
부터 전보가 왔다.
화차 2량에 구석과 점토를 실어보내니 받아서 쓰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해방의 혼란 와중에 행방이 묘연해져서 써볼수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이 일은 행남사의 기술수준을 널리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2차대전의 패망으로 일제의 기세가 기울어진 해방직후 명실공히
행남사의 기술수준을 인정받는 결정적인 일이 하나 있었다.
해방전 "대판요업" 서울출장소에 근무하던 한 조선인이 해방된 바로
다음달인 45년9월 경상도 동래(지금의 부산시)에 있는 일제의 애자공장을
인수하려 했다.
일인들이 철수해 버리자 미군정청에 운영신청을 낸것이다.
이 신청을 받은 군정청에서는 신청자가 제조기술이 없으니 "행남사로부터
기술지도를 받을것"을 조건으로 운영권을 양도해 주겠다고 했다.
그 신청자가 찾아와 간곡히 부탁하기에 나는 쾌히 응낙하고 그와함께
현지공장을 답사한뒤 서울 군정청으로 가 "우리가 기술지도를 할것이니
안심하고 공장을 넘겨주라"는 서류처리를 해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2일자).
자기제조 기술수준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일례로 창업직후 현목포 서부국민학교옆에 일인부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매일처럼 공장에 찾아와 우리 그릇을 얻어가려고 안달이었다.
그들은 당시 밤색 플라스틱 식기로 밥을 먹었는데 날마다 한명씩 찾아와
정문앞에서 절을 넙죽하고는 자기네 밥그릇에서 냄새가 난다고 우리 사기
그릇을 달라고 청했다.
행남사의 기술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것은 바로 삼척에 있는 "삼정
유지주식회사"에 애자를 만들어 공급했던 일이었다.
"삼정유지"는 당시 일본인 소유의 큰 비누제조공장이었는데 중요한 부속품
으로 폭 1m정도의 대형 절연 애자가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자가 그만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전시라 일본에서 제품을 만들어 실어오는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형편
이었다.
다급해진 그들은 부산의 "대한도기" 여주의 "조선도기" 두 자기공장에
애자를 만들어 줄것을 부탁했지만 어디에서도 선뜻 애자를 만들어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그토록 큰 애자를 완벽하게 절연효과를 내도록 만들수 있는 기술이
모자랐던 까닭이었다.
내게 그 애자 공급의뢰가 들어온 것이 45년5월경.
즉석에서 나는 만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달동안의 작업끝에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줬다.
그러자 그들은 대단히 만족해하며 나를 서울반도호텔로 초청해 융숭한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7월에 목포로 예기치않은 손님 두명이 찾아왔다.
총독부 직원이라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일전에 내가 서울에서 삼정유지 간부들을 만나 자기공장을
하는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었는데 애자를 만들어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던 그들이 총독부에 "행남사가 애로사항이 많다는데 좀 들어주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총독부 직원들은 내게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줄테니 말하라고
했다.
나는 "이북에서 구석과 점토를 실어와야 하는데 화차를 배정받기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전쟁으로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이 도와주기는 뭘 도와
준다는 말인가"고 한동안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8월1일 느닷없이 총독부로
부터 전보가 왔다.
화차 2량에 구석과 점토를 실어보내니 받아서 쓰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해방의 혼란 와중에 행방이 묘연해져서 써볼수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이 일은 행남사의 기술수준을 널리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2차대전의 패망으로 일제의 기세가 기울어진 해방직후 명실공히
행남사의 기술수준을 인정받는 결정적인 일이 하나 있었다.
해방전 "대판요업" 서울출장소에 근무하던 한 조선인이 해방된 바로
다음달인 45년9월 경상도 동래(지금의 부산시)에 있는 일제의 애자공장을
인수하려 했다.
일인들이 철수해 버리자 미군정청에 운영신청을 낸것이다.
이 신청을 받은 군정청에서는 신청자가 제조기술이 없으니 "행남사로부터
기술지도를 받을것"을 조건으로 운영권을 양도해 주겠다고 했다.
그 신청자가 찾아와 간곡히 부탁하기에 나는 쾌히 응낙하고 그와함께
현지공장을 답사한뒤 서울 군정청으로 가 "우리가 기술지도를 할것이니
안심하고 공장을 넘겨주라"는 서류처리를 해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