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해방 직전에 자칫 행남사의 운영권을 빼앗겨 버릴
결정적인 위기가 있었다.

동래 도자기공장의 인수서류를 해주기 위해 45년9월 미군정청에 들렀을때
마쓰모도이라는 일본인 기사가 은밀히 불러 보관서류철의 서류하나를 보여
줬다.

"행남사 도자기공장의 매주 결정의 건"이라는 제목인 것이었다.

모골이 송연했다.

애써 세운 공장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헐값으로 매수당할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해방 직전 일제는 본토내 대부분의 공장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한국에서 이에 대용할 공장을 찾고 있었는데 행남사가 그 대상업체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식민지 경영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몇년동안에 걸쳐 고생고생 해가며
키워온 기업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쪽같이 빼앗기게 되어 있었다.

세상이 이런 법이 어디있단 말인가.

천만 다행으로 그 인수계획이 8.15해방으로 불발에 그쳤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행남사는 존재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8.15해방은 내게 천우신조와 같은 것이다.

해방되던 바로 그날도 일본군들은 여느때처럼 광주에서 트럭을 끌고와
우리공장에서 납품물건들을 실어갔다.

오전동안 이 일을 하고 점심무렵이 되어서 난 남교동에 있는 신정주조장엘
갔다.

그 무렵 목포 앞바다에선 공출미를 실어가던 배가 침수되어 버렸다.

아까운 쌀을 물에 빠뜨려버린 것이다.

이것을 실어가지도, 버리지도 못할 처지가 되자 일인들은 바닷물에 젖은
그 쌀을 건져다 주조장에다 주며 술을 해먹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당시 전국에서는 식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막걸리 한되를 구하기가 천금
같았다.

그런데 목포사람들은 공출미가 바다에 빠진덕에 술 하나는 마음대로
먹게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난 매일같이 신정주조장으로 가 술을 공짜로 얻어다
종업원들에게 나눠줬다.

술이 귀한 시절이라 종업원들이 술만 보면 앉은자리에사 바닥을 볼 정도
였다.

그러던 어느날 주조장 박정모사장이 은밀히 나를 담 귀퉁이로 데려갔다.

그리고 귀에 대고 가느다랗게 "일본군이 항복했다고 합니다"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지 몇시간 안있어 거리에 나가보니 이미 거리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이 온 것이다.

드디어 행남사가 헐값의 강제납품을 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나는 우리공장에서 나오는 모든 물량을 당시 목포시내의
자기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순덕씨(현목포시내 보건약국 유재열씨 모친)
에게 넘겨줬다.

제값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뒤 6.25이후에는 판매권을 양병진씨라는 사람에게 넘겨줬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전국에 걸쳐 판매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 판매의 교두보를 확보
하기 위해서였다.

생산과 판매를 동시에 하지않고 판매권을 넘겨준 것은 생산에 전념하면서
기술역량을 쌓아가는게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판매까지 한다면 이익이 더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판매에까지 손을 쓸 여력이 없었다.

지나친 욕심을 내면 실패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나의 이런 판단은 적중했다.

그때 내가 판매에까지 뛰어들어 일을 방만하게 벌여 놓았다면 후에 사세를
확장하는데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제품의 판매권을 넘겨받은 양병진씨가 후에 자기공장을 인수해 생산과
판매를 포괄하는 운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에 그쳤던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