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이 일어났던 다음달인 1960년6월 일본에 맨처음 도자기제조기술을
전해줬던 주인공의 14대손인 심수관씨를 초청했다.

정유재란때 왜군 선봉장 우카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등은 자국의
도자기문화 부흥을 위해 조선에서 수많은 도공들을 납치해갔는데 심수관
씨의 14대조 심당길은 그렇게 끌려갔던 남원과 그 인근출신 87명 도공중의
수장격이었다.

그들이 도자기를 만들었던 사쓰마야키는 일명 나에시로가와야키라고도
부르는데 사쓰마야키에는 하얀사쓰마와 검은사쓰마가 있어서 하얀사쓰마는
번주인 시마스에, 검은 사쓰마는 서민용으로 쓰였다.

이 비법이 대대로 내려왔으나 명치유신이후 14대인 심수관씨의 조부인
12대에서 잃어버리고 14대인 그가 30여년간 연구끝에 비법을 재현해냈던
것이다.

이 독창의 비기를 "이카리구로"라고 부르고 희고 검은 도자기를
만들어 바친 탓으로 심수관씨일가는 대대로 사족대우를 받았으나
그때껏 고국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를 불러들여 그의 선조들의 출생지와 함께 임진왜란 이전의
도요지를 찾아 그의 뿌리를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제일먼저 행남사를 방문해 그의 말대로 "당신은
한국에서,저는 일본에서 조선 도자기의 전통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새삼 한핏줄을 이은 동족이라는 사실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며
우의를 나눴다.

그후 그는 박정희대통령을 면담한뒤 나와 함께 남원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선대의 묘와 도요지를 찾아나섰는데 그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던
사실은 못내 아쉽기만 했다.

한편 60년대들어 행남사는 국내 시장에 상당한 분량의 홈세트를
공급했는데 이 홈세트란 8~12인이 만찬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각종
용기들을 한데 모은 80~120개의 조립제품으로 이것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60년6월에 행남사가 경무대의 의전용 식기를 만들어 공급했던 일이
그것이다.

이전에 경무대는 외국 귀빈접대용 식기류들을 일본에서 수입해 썼었는데
가뜩이나 반일의식이 투철했던 이승만박사는 자유당말기 미국의
아이젠하워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그 준비를 하면서 "도자기문화의
본산지인 우리나라가 국빈을 맞으면서 외제 식기를 쓸수 없다"며
의전용식기 일체를 국산으로 교체하도록 지시했다.

그 대상기업으로 행남사를 지목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결국 이대통령의 하야로 허정 내각수반의 영접을
받았다)

그런데 그 주문이 이루 말할수 없이 까다로웠고 납기도 2주일밖에 주질
않았다.

최소한 1개월이상의 기한은 줘야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낼 것인데
그 2주일이라는 기간은 전사원이 다른 일을 모두 제쳐놓고 매달려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할수 있는가. 서슬 퍼렇던 경무대의 지시인데..

작업에 들어간후 가마에서 그릇이 나올때에는 도경국장이 직접와
입회했다.

당시 제품에 은으로 가느다란 줄을 치게 했는데 난처한 일은 행남사가
제품마다 넣었던 고유의 상징마크인 살구꽃문양이 붉은색으로 되어
있어 하얀 도자기에 붉은 살구꽃문양의 제품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를 본 도경국장은 질겁을 해서 제품을 모두 불합격시켜버렸다.

이에 우리는 하는수 없이 은으로 살구꽃문양을 다시 넣어 연일 철야작업
을 한 끝에 납품했다.

그러나 이 살구꽃문양은 납품후에도 끝까지 말썽이었다.

제품은 온갖 기술과 정성을 다해 만들어졌고 경무대에서도 만족해
했는데 한가지 살구꽃모양이 일본의 국화인 벚꽃과 비슷해서 행남사가
일본제품을 사다가 행남사 마크만 넣어서 납품한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사게 된 것이다.

실제 경무대측에선 동대문시장을 뒤져 일본제품을 사와서는 납품한
식기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으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수입품이 아니라 순 행남사의 제품임을 입증하느라
실로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