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 업계 처음 홍콩에 수출테이프를 끊기도 했으나 품질고급화에는
일정한 한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생산설비를 확충하기도 했다.

공장 한쪽의 땅을 넓혀 신공장으로 쓸 1,500평의 건물을 신축하기로 한
것이다. 그 정도의 공장건물은 당시로서는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었다.

자금은 DLF(미 저개발국개발기금)차관으로 4만달러를 도입해 조달했다.

나는 신설비를 결정하기위해 관련자료를 모두 수집하는 한편 일본 유럽
등을 방문해 설비리스트를 직접 선택 작성했다.

설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종래의 석탄가마를 유류용 터널킬린으로
교체하는 소성설비의 현대화가 시급했다.

이에따라 신공장의 증설설비를 보면 본소성가마로 길이 53m의 터널킬른
1기,초벌구이 가마로 길이 30m짜리 터널킬른 1기였는데 이 정도의
규모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외에도 40평규모의 자동건조실이 2실,성형기 30대,유약을 자동으로
씻어주는 자동제유기 3대,2t짜리 볼밀 4대,흡상펌프 2대,멤브란펌프
2대,교반기 5대등의 최신설비를 갖추기로 했다.

이렇게 신공장이 완공된다면 시설규모는 차치하고라도 그때 이미
160여명에 달하는 종업원 수가 300여명이 넘게될 예정으로 행남사
창업이래 최대규모의 설비확장 프로젝트였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이 신공장은 기공식부터 국내 도자기업계는 물론
목포시민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나는 또 생산설비의 증가외에도 제품의 품질향상을 위해서 서공시설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판단아래 신공장 건설장소에서 가까운 구공장(현재
상회화공공정)건물에 마플킬른(상회화공가마)1기를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공장을 완비해놓고 보니 그 웅장한 반원형의 공장건물은
바로 옆 구공장 건물과 시설에 비교해 가히 새로운 도자기산업의
본산지로서의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지금 기차로 목포 산정동을 지나가다 보면 "행남자기"라고 쓰인 큰
건물이 눈에 띠는데 이것이 그때 지은 신공장으로 당시 목포시내
제조공장중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막상 공장운영에 들어가자 기대와는 달리 쉽지만은 않았다.

바로 다음해인 65년부터 이 신공장건설로 인한 후유증으로 일대 경영
위기가 몰아닥쳤다. 가장 큰 문제는 새로 건설한 신공장의 신규설비인
터널킬른에서 나타났다.

종래의 석탄가마를 유류용 터널킬른으로 교체해 시운전과 함께 시험생산
에 들어갔으나 기술자들이 이 새설비에 대한 운전미숙으로 생산제품들이
거의 대부분이 불량이었다.

갓 구원낸 그릇들이 소성불량으로 금이 가거나 내화압에 녹아서 달겨
붙어버리는 등 상황은 걷잡을수 없이 전개되었다.

좋자고 했던 일에 되레 마가 끼어든 것이다.

이 전례없는 비상사태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바람에 도자기제조의
특성상 또다시 수개월간의 시운전과 그에따른 시험생산을 되풀이할수
밖에 없는 시행착오가 뒤따랐다.

물론 이기간동안 생산라인을 원활이 가동할수 없었기 때문에 시장에
내놓을 제품도 없었고 이렇게 공급이 차질이 생기다보니 이미 판매했던
제품의 대금회수가 늦어져 순식간에 회사는 운영자금 부족사태에
봉착했다.

게다가 신공장 가동을 위해서는 종래 160여명의 종업원을 300여명으로
늘려랴 했는데 예상과 달리 이들 신규사원들의 기술숙련도가 낮아 사원은
전체 400여명으로 늘어났으니 가뜩이나 어려운 판에 인건비부담이 가중
되었고 이렇게 채용한 240여 신규사원들마저 도자기제조에 관한한 백지
상태에 가까운 비숙련공들이라서 생산라인에 직접 투입하기까지에는
수개월간에 걸친 교육기간이 필요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