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논단] 일벌백계와 백죄백벌의 선택..호영진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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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친구따라 돼지치기를 지켜보면서 너무나 정직한 자연법칙에
새삼 놀랐다.
비싼 복합사료를 사먹이면 당장 털에 윤기가 흐르고,보릿겨를 주면
이내 꺼칠해진다.
가차가 없다.
더구나 제새끼 젖뺏어 먹을까봐 남의 새끼 죽이는 어미돼지의 지독한
모성애를 보고는 소름마저 끼쳤다.
무서운 돼지의 모성애 젖꼭지가 16개인 암퇘지들의 1회출산 새끼수는
들쭉 날쭉이다.
고루 젖을 먹게 한답시고 많이 난 쪽의 새끼를 적게 낳은 어미의
우리안에 옮겨 넣은 직후 참혹한 꼴을 본것이다.
그러려면 받아 키울 어미의 분뇨를 입양될 새끼의 몸에 미리 발라
밤중에 슬쩍 넣어줘야 한다.
그래야 제 새끼인줄 알고 차별없이 키우더라는 경험담을 사후에야
들었다.
여러해 같은 산을 오르다 보면 새싹 꽃 신록 녹음 단풍 낙엽의
틀림없는 반복에 감복한다.
자연 스스로의 법칙준수는 엄격하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원망스런 가뭄과 장마도 분명 원인이 있어 일어난다.
세상사는 어떤가.
아마도 인간 세자가 들어있으니 사람들은 자연법칙의 적용에서 제외되는
자신들만의 세상이 따로 있고,그들 마음 내키는대로 할수 있다고
자만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도 엄연히 대자연의 일부요 생물의 일종,동물의 한 부류일진대
인간세상인들 자연의 원리에서 배제될수 있겠는가.
우리는 잘 찍은 동물생태계 필름을 보고는 자주 놀란다.
하찮아 뵈는 미물들이지만 제각기 살아가는 몸짓은 어느하나 영악지
않은 것이 없다.
필경 높은 지능지수를 지녔으리라고 느낄만큼 생각이 깊고 재간도
좋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입네 자칭하며 혼자만
똑똑한체 한다.
칠락팔락하는 여론 더구나 이 선선한 계절에 안어울리게 끔찍한
사건들이 뇌리를 스치다 보니 속이 뒤틀린다.
과연 책임의 한계는 어디쯤에 그어야 할까.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경쟁에 여념없는 매스컴들은 칠락팔락 찧고
까부르기 바쁘다.
지존파등의 엽기적 범행에는 사회책임도 상당하다던 자성적 흐름이
어느새 지탄을 받고는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
대신 흉악범은 최단시일내에 사회에서 영원히 분리시키는 제도를
강구해야 한다는 우렁찬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럴수 밖에 없는 고충을 안다.
재발을 경계하자면 책임을 전적으로 본인들에게 귀속시켜 중벌을
줘야 한다.
섣불리 사회책임 운운하다간 카메라앞에서 벼르던 신세타령이나
늘어놓으려는 모방적 시도가 꼬리를 물 위험이 있다.
당장 최강의 엄포로 위기를 모면하고 보는수 밖엔 없다.
정말이지 독을 품은 범인들의 언동을 매체들이 반복해 내보낸 처사는
사려 깊었다고 할수는 없다.
필자가 30여년전 근친상간 사건을 써냈을때 "묻혀서 그렇지,이런
탈선은 언제나 있어.보도해야 백해무익이야" 하면서 데스크는 깔아
뭉갰다.
불만보다는 납득이 갔다.
재발방지를 위해선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정도 문제다.
컬러시대에 와선 더 그렇다.
선혈낭자한 사건현장이 클로즈업돼 현장보다 더 선명하고 더 즉시적이다.
흉포한 사건만이 아니다.
피부노출과 폭력물이 갈수록 도를 높여간다.
선진국이 그러니 따라가도 좋은가.
미국에선 살인으로 93년에만 2만4천5백명이 희생됐다.
조금 시각을 넓히면 매스컴은 여러면에서 국민의 행태를 크게 좌우한다.
가령 주말이나 요즘같은 단풍철이면 매스컴이 가만두질 않는다.
"왜 지금 당장 차타고 놀러가지,그러고 앉아 뭉개느냐!"고 사뭇
성화다.
신문만해도 던져버리면 그만인데 묘하게 욕하며 보는게 텔레비전이다.
언론이 모든 책임을 지자는 것도,"땡 전 뉴스"시대처럼 아픈데
감추자는 것도 아니다.
책임있고 영향력 있는 직분의 사람들이 모두 내일로 알고 나서야
한다.
여론의 바람이 불때 그 풍향 풍속에만 맞춰서 목청 높이다가 바람이
자기 무섭게 딴청을 떨어 가지고는 백년하청이다.
요즘 사건에서 과연 사회책임은 없다고 강변할수 있는가.
마치 한강물 흐린 이유를 윗물 아랫물중 어느 한쪽에서 찾으려는듯
세금절도 사건에서도 상과 하가 책임을 서로 미루려는 양상이다.
위는 조금만 썩어도 영향의 범위가 넓으니 소수만 썩었다고 큰소리칠
일 못된다.
또 아래는 조금씩 썩어도 총수가 많으니 국민에게 감촉된다.
상하를 가릴 이유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반성할 근본오류의 하나는 소위 일벌백계라는 구호에의
순치다.
백명이 죄를 범했을때 그중 한명만 처벌하여 나머지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인다는 뜻이다.
이 경구가 말로나 실제로나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는 자명하다.
그말을 많이 쓰고 그렇게 행동한 것도 실은 군사통치의 산물이다.
법앞에 평등 확신을 인용되는 일벌백계의 최적례를 봐도 안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은 책임을 물어 가장 아끼는 마속(마속)한 사람의
목을 울면서 벰으로써 전 병사의 사기를 올려 전국을 만회했다.
여기서 우리는 군율과 목민율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음미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전에서 병사들이 사기가 무너져 우르르 후퇴하려 할때 그 모두를
군법대로 처형하면 누구를 거느리고 싸우나.
이때 본보기로 극소수만 공개처형 함으로써 기강를 잡고 병력을
아껴 위기를 넘는 것이 지장의 선택이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다르다.
같은 죄를 지으면 똑같은 처벌을 받아야 법의 형평이다.
백죄백벌인 셈이다.
일벌백계의 최대약점은 운좋으면 안잡힌다는 요행수 풍조의 확산에
있다.
법앞에 평등하다는 법치주의를 구가하면서 걸핏 엄벌을 외치다가
유야무야한다면 앞뒤가 맞지않는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3일자).
새삼 놀랐다.
비싼 복합사료를 사먹이면 당장 털에 윤기가 흐르고,보릿겨를 주면
이내 꺼칠해진다.
가차가 없다.
더구나 제새끼 젖뺏어 먹을까봐 남의 새끼 죽이는 어미돼지의 지독한
모성애를 보고는 소름마저 끼쳤다.
무서운 돼지의 모성애 젖꼭지가 16개인 암퇘지들의 1회출산 새끼수는
들쭉 날쭉이다.
고루 젖을 먹게 한답시고 많이 난 쪽의 새끼를 적게 낳은 어미의
우리안에 옮겨 넣은 직후 참혹한 꼴을 본것이다.
그러려면 받아 키울 어미의 분뇨를 입양될 새끼의 몸에 미리 발라
밤중에 슬쩍 넣어줘야 한다.
그래야 제 새끼인줄 알고 차별없이 키우더라는 경험담을 사후에야
들었다.
여러해 같은 산을 오르다 보면 새싹 꽃 신록 녹음 단풍 낙엽의
틀림없는 반복에 감복한다.
자연 스스로의 법칙준수는 엄격하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원망스런 가뭄과 장마도 분명 원인이 있어 일어난다.
세상사는 어떤가.
아마도 인간 세자가 들어있으니 사람들은 자연법칙의 적용에서 제외되는
자신들만의 세상이 따로 있고,그들 마음 내키는대로 할수 있다고
자만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도 엄연히 대자연의 일부요 생물의 일종,동물의 한 부류일진대
인간세상인들 자연의 원리에서 배제될수 있겠는가.
우리는 잘 찍은 동물생태계 필름을 보고는 자주 놀란다.
하찮아 뵈는 미물들이지만 제각기 살아가는 몸짓은 어느하나 영악지
않은 것이 없다.
필경 높은 지능지수를 지녔으리라고 느낄만큼 생각이 깊고 재간도
좋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입네 자칭하며 혼자만
똑똑한체 한다.
칠락팔락하는 여론 더구나 이 선선한 계절에 안어울리게 끔찍한
사건들이 뇌리를 스치다 보니 속이 뒤틀린다.
과연 책임의 한계는 어디쯤에 그어야 할까.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경쟁에 여념없는 매스컴들은 칠락팔락 찧고
까부르기 바쁘다.
지존파등의 엽기적 범행에는 사회책임도 상당하다던 자성적 흐름이
어느새 지탄을 받고는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
대신 흉악범은 최단시일내에 사회에서 영원히 분리시키는 제도를
강구해야 한다는 우렁찬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럴수 밖에 없는 고충을 안다.
재발을 경계하자면 책임을 전적으로 본인들에게 귀속시켜 중벌을
줘야 한다.
섣불리 사회책임 운운하다간 카메라앞에서 벼르던 신세타령이나
늘어놓으려는 모방적 시도가 꼬리를 물 위험이 있다.
당장 최강의 엄포로 위기를 모면하고 보는수 밖엔 없다.
정말이지 독을 품은 범인들의 언동을 매체들이 반복해 내보낸 처사는
사려 깊었다고 할수는 없다.
필자가 30여년전 근친상간 사건을 써냈을때 "묻혀서 그렇지,이런
탈선은 언제나 있어.보도해야 백해무익이야" 하면서 데스크는 깔아
뭉갰다.
불만보다는 납득이 갔다.
재발방지를 위해선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정도 문제다.
컬러시대에 와선 더 그렇다.
선혈낭자한 사건현장이 클로즈업돼 현장보다 더 선명하고 더 즉시적이다.
흉포한 사건만이 아니다.
피부노출과 폭력물이 갈수록 도를 높여간다.
선진국이 그러니 따라가도 좋은가.
미국에선 살인으로 93년에만 2만4천5백명이 희생됐다.
조금 시각을 넓히면 매스컴은 여러면에서 국민의 행태를 크게 좌우한다.
가령 주말이나 요즘같은 단풍철이면 매스컴이 가만두질 않는다.
"왜 지금 당장 차타고 놀러가지,그러고 앉아 뭉개느냐!"고 사뭇
성화다.
신문만해도 던져버리면 그만인데 묘하게 욕하며 보는게 텔레비전이다.
언론이 모든 책임을 지자는 것도,"땡 전 뉴스"시대처럼 아픈데
감추자는 것도 아니다.
책임있고 영향력 있는 직분의 사람들이 모두 내일로 알고 나서야
한다.
여론의 바람이 불때 그 풍향 풍속에만 맞춰서 목청 높이다가 바람이
자기 무섭게 딴청을 떨어 가지고는 백년하청이다.
요즘 사건에서 과연 사회책임은 없다고 강변할수 있는가.
마치 한강물 흐린 이유를 윗물 아랫물중 어느 한쪽에서 찾으려는듯
세금절도 사건에서도 상과 하가 책임을 서로 미루려는 양상이다.
위는 조금만 썩어도 영향의 범위가 넓으니 소수만 썩었다고 큰소리칠
일 못된다.
또 아래는 조금씩 썩어도 총수가 많으니 국민에게 감촉된다.
상하를 가릴 이유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반성할 근본오류의 하나는 소위 일벌백계라는 구호에의
순치다.
백명이 죄를 범했을때 그중 한명만 처벌하여 나머지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인다는 뜻이다.
이 경구가 말로나 실제로나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는 자명하다.
그말을 많이 쓰고 그렇게 행동한 것도 실은 군사통치의 산물이다.
법앞에 평등 확신을 인용되는 일벌백계의 최적례를 봐도 안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은 책임을 물어 가장 아끼는 마속(마속)한 사람의
목을 울면서 벰으로써 전 병사의 사기를 올려 전국을 만회했다.
여기서 우리는 군율과 목민율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음미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전에서 병사들이 사기가 무너져 우르르 후퇴하려 할때 그 모두를
군법대로 처형하면 누구를 거느리고 싸우나.
이때 본보기로 극소수만 공개처형 함으로써 기강를 잡고 병력을
아껴 위기를 넘는 것이 지장의 선택이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다르다.
같은 죄를 지으면 똑같은 처벌을 받아야 법의 형평이다.
백죄백벌인 셈이다.
일벌백계의 최대약점은 운좋으면 안잡힌다는 요행수 풍조의 확산에
있다.
법앞에 평등하다는 법치주의를 구가하면서 걸핏 엄벌을 외치다가
유야무야한다면 앞뒤가 맞지않는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