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한담] '한때 최고인기..지금도 후회없어..변사 신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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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초창기, 무성영화시절에 관객을 울리고 웃겼던 변사.
60년대들어 무성영화가 사라지면서 무대의 뒤켠으로 물러나 요즘의 젊은층
에겐 이들의 역할이 말로만 전해진다.
그러나 허술한 가설극장에서 무성영화를 감상했던 50대이상의 팬들은
변사를 은막의 진짜 스타로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변사 신출씨(69.본명 신병균).
그는 14세때부터 27년동안 전국의 극장을 누비며 ''장화홍련전'' ''검사와
여선생'' 등 100편이 넘는 영화의 변사를 맡아 인기를 독차지했던 사람이다.
지난 69년 문화공보부 영화기사로 취직하면서 직업으로서의 변사를 그만둔
뒤 가끔 대학이나 연극계에서 특별 초청해 오면 올드팬들을 위해 출연하고
있다.
서울 성동구 자양동 228의80으로 왕년의 명변사 자택을 찾아 그의 인생
역정을 들어봤다.
-변사라는 직업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지요.
<> 신변사 =대동강 입구인 평남 진남포 비석리에서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이 김포 통진중학교 교장을 지낼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제가 두살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버님께서 재혼을 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인 14살때 계모가 제게 싸준 꽁보리밥 도시락과 쌀밥에
보리쌀을 살짝 덮은 이복동생의 도시락을 바꿔치기했다가 겁이 나 가출
했지요.
이후 평양 신교리 가설극장에서 청소와 잔심부름을 해주고 숙식을 하다
어느날 무성영화 "임자없는 나룻배"를 공연하는데 유명 변사인 김성동씨가
평양기생에 빠져 나타나지 않는 거였어요.
손님들은 "돈 내놓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지요.
저는 그때 남의 흉내를 잘내 청소를 하면서 김변사의 목소리를 흉내내곤
했는데 이걸 들은 기도주임이 저보고 "야, 신꼬마야. 너 한번 올라가서
해볼래" 하길래 겁도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갔지요.
-그게 데뷔 무대였습니까.
<> 신변사 =정식 데뷔무대는 아니고 땜방으로 했는데 그럴싸하게 해냈지요.
끝날무렵에 도착한 김성동씨가 "야, 너 대단하다"라고 칭찬해 주더군요.
그리고 계모 밑에서 고생한다는 제 얘기를 듣더니 따라다니라고 해 그 때
부터 변사생활에 나선 셈이지요.
-우리나라 무성영화의 전성기라면 1926년부터 1935년까지를 잡고 있습니다.
신선생께서 변사생활을 시작한게 1942년이고 보면 변사라는 직업의 쇠퇴기
라고 할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당시의 변사생활은 어땠나요.
<> 신변사 =쇠퇴기라니, 천만에요.
당시는 35세인 김성동씨를 비롯 최예덕 서상필 서상오 조화수 송동오등
30대의 변사들이 장안기생들에게 최고인기가 있을 정도로 변사의 유명세는
대단하던 시절이었지요.
변사의 월급은 1회 상영에 쌀 세가마 값인 1백50~2백전을 받을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그중에 14살인 저는 최연소 조수, 일명 "빵꼬마와시"(스페어)여서 월급도
제대로 못받았지요.
그래도 제가 출연하는 포스터엔 "천재소년 변사 신현군을 들어보셨나요"
라는 광고문구를 넣어 주었는데 그때 가명인 신현이란 이름을 썼지요.
평양 원산 함흥 원주 제천 대구 부산 울산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그런 조수변사 노릇도 서울의 우미관에서 "이젠 네 갈 데로 가라"는 김씨의
말과 함께 끝이 났지요.
-조수 생활을 그만두고 곧바로 본격적인 변사생활에 들어갔습니까.
<> 신변사 =기거하던 우미관에서 나온 저는 다시 평양 집에 돌아왔으나
아버님이 중풍에 걸리자 계모가 의붓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예전처럼 선교리 가설극장의 청소일로는 약시중은 커녕 쌀값을 마련할
수도없어 아버님을 모시고 조선영화(주)경성배급소 영사기사로 일하던
서울의 큰형에게로 가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뒤 해방이 되고 큰형은 영사기사로, 권투선수 출신인 작은형은
기도주임을, 저는 변사를 각각 맡아 우리 3형제가 본격적으로 무성영화
상영팀이 돼 전국을 순회했습니다.
-참, 신출이란 예명은 언제부터 썼나요.
<> 신변사 =8.15해방전후에 "신불출"이란 유명한 만담가겸 변사가 있었는데
이사람이 6.25때 이북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큰형이 "신불출이가 북으로 갔으니 이제 천재소년 신출이가
나왔다"며 신불출과 비슷한 이름인데다 신가에서 새로 나왔다는 뜻으로
제게 "신출"이란 예명을 붙여줬지요.
"심청전"상영 때 처음 그 예명을 썼지요.
-변사 뿐아니라 대중예술가의 생활은 결국 관객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자신의 변사시절 인기가 어느 정도였다고
평가하십니까.
<> 신변사 =자화자찬 같습니다만 해방후 "임자없는 나룻배" 나운규 주연의
"아리랑" "사나이" "수험료" "장화홍련전" "홍길동전"등의 필름을 메고
전국을 돌면서 상영을 했는데 반응이 대단했답니다.
특히 "검사와 여선생"같은 무성영화는 현재의 중앙극장에서 개봉을 했는데
하루에 4~5회씩 상영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게다가 돈암동의 동도극장에서도 30분 늦게 동시상영을 했는데 필름이
복사가 안되던 때라 한 쪽에서 일부 상영하고 잠시 문화영화나 뉴스를
돌리고 있으면 그 때를 이용해 자전거를 타고 다른 극장에 달려가 변사를
해주던 기억도 납니다.
-인기가 대단했던 만큼 돈도 많이 벌었겠습니다.
<> 신변사 =그땐 무성영화가 유일한 대중오락이었기 때문에 흥행이 잘
됐지요.
영화상영 사업에 재미를 본 우리 형제는 신출영배사란 영화배급회사를
차렸고 경기도포천에 향군극장을 직접 운영했지요.
부산 피란시절 결혼도 했고 돈도 많이 벌어 지금 서울 장충동 태극당
자리에 있던 저택을 구입할 정도였습니다.
이 무렵 인기있던 여배우들은 조미령, 노경희, 눈물의 여왕 전옥이었고
고교생이던 신영균이 데뷔했었지요.
그러던 것이 향군극장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전성기도 막을 내려버렸지요.
당시 보험이 없던 시절이라 도산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장충동 집을 비롯해 숟가락까지 전재산을 팔아 빚을 갚고나니 알거지가
되더군요.
남은 거라곤 필름 뿐이었지요.
재기를 위해 전국을 돌며 가설극장을 다시 시작했으나 시대의 조류는
이미 바뀌고 있었습니다.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이미 무성영화 시대는 막을 내렸고 TV의 등장으로
영화마저 불황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가셨는지요.
<> 신변사 =다행히 지난 69년 국무원 사무처 공보실의 영사기사로 들어가
지난 78년 퇴직할 때까지 "대한뉴스"를 찍거나 문화영화를 상영하러 지방을
다녔지요.
그 뒤엔 79년부터 개인택시 면허를 얻어 핸들을 잡다가 작년에 그만
뒀습니다.
-변사란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는데다 신선생님 말씀대로 임기응변식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다면 선천적인 자질 뿐아니라 관련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도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 신변사 =물론입니다.
영화와 관련되는 내용을 책을 통해 충분히 숙지하고 입으로 달달 욀 정도가
돼야 변사활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변사를 맡은 영화 뿐아니라 다방면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심지어 성경책까지 탐독했습니다.
-30년가까이 변사활동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도 많을텐데요.
<> 신변사 =일제시대 조수변사 시절에 원산에서 아리랑을 상영할
때였습니다.
영진이역의 나운규가 미쳤다가 제정신을 차렸으나 일본순사에 끌려가는
끝장면이었는데 그만 흥분해서 대사를 엉뚱하게 해버렸지요.
"영희야, 이 못난 놈은 미쳐서 사람을 죽여 끌려간다. 왜놈 순사들에게
묶여가 아버지를 못모시는게 천추의 한이로구나"하고 말입니다.
당장 맨앞 객석에 앉아 있던 고등계 형사가 뛰어올라와 저를 끌고
갔습니다.
3일간 유치장에 갇혀 실컷 얻어맞고 "누가 시켰느냐"는 추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무슨 배후가 있을 턱이 있나요.
사수이던 김성동씨가 서울에서 달려와 간신히 꺼내줬지요.
-대중예술에 종사하신 분으로서 혹시 판소리나 국악기 연주자처럼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는 길은 없는지요.
<> 신변사 =인간문화재라뇨. 변사로서 화려했던 과거는 잊어버렸어요.
요즘 세대들이야 어디 변사들의 말솜씨에 귀나 귀울이겠습니까.
1년에 한두번 대학같은 데서 초청이 오면 마누라가 제가 죽으면 관속에
넣는다고 보관하고 있는 "검사와 여선생"이나 "며느리 설움"의 필름을 들고
나가기는 하지만 제가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변사를 했던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습니까.
<> 신변사 =전혀 없습니다.
제가 좋아서 했던 직업이었고 나름대로 최고가 됐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신변사 =배경음악이 나올 때마다 저 장면에선 "아, 어찌하여 친엄마를
몰라보시나이까"등 변사 노릇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요.
대사와 음악보다는 변사의 묘미가 더욱 낫지요.
그런데 그건 제 생각이구요.
시대가 어디 그렇습니까.
< 대담 = 최종천 사회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일자).
60년대들어 무성영화가 사라지면서 무대의 뒤켠으로 물러나 요즘의 젊은층
에겐 이들의 역할이 말로만 전해진다.
그러나 허술한 가설극장에서 무성영화를 감상했던 50대이상의 팬들은
변사를 은막의 진짜 스타로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변사 신출씨(69.본명 신병균).
그는 14세때부터 27년동안 전국의 극장을 누비며 ''장화홍련전'' ''검사와
여선생'' 등 100편이 넘는 영화의 변사를 맡아 인기를 독차지했던 사람이다.
지난 69년 문화공보부 영화기사로 취직하면서 직업으로서의 변사를 그만둔
뒤 가끔 대학이나 연극계에서 특별 초청해 오면 올드팬들을 위해 출연하고
있다.
서울 성동구 자양동 228의80으로 왕년의 명변사 자택을 찾아 그의 인생
역정을 들어봤다.
-변사라는 직업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지요.
<> 신변사 =대동강 입구인 평남 진남포 비석리에서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이 김포 통진중학교 교장을 지낼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제가 두살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버님께서 재혼을 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인 14살때 계모가 제게 싸준 꽁보리밥 도시락과 쌀밥에
보리쌀을 살짝 덮은 이복동생의 도시락을 바꿔치기했다가 겁이 나 가출
했지요.
이후 평양 신교리 가설극장에서 청소와 잔심부름을 해주고 숙식을 하다
어느날 무성영화 "임자없는 나룻배"를 공연하는데 유명 변사인 김성동씨가
평양기생에 빠져 나타나지 않는 거였어요.
손님들은 "돈 내놓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지요.
저는 그때 남의 흉내를 잘내 청소를 하면서 김변사의 목소리를 흉내내곤
했는데 이걸 들은 기도주임이 저보고 "야, 신꼬마야. 너 한번 올라가서
해볼래" 하길래 겁도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갔지요.
-그게 데뷔 무대였습니까.
<> 신변사 =정식 데뷔무대는 아니고 땜방으로 했는데 그럴싸하게 해냈지요.
끝날무렵에 도착한 김성동씨가 "야, 너 대단하다"라고 칭찬해 주더군요.
그리고 계모 밑에서 고생한다는 제 얘기를 듣더니 따라다니라고 해 그 때
부터 변사생활에 나선 셈이지요.
-우리나라 무성영화의 전성기라면 1926년부터 1935년까지를 잡고 있습니다.
신선생께서 변사생활을 시작한게 1942년이고 보면 변사라는 직업의 쇠퇴기
라고 할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당시의 변사생활은 어땠나요.
<> 신변사 =쇠퇴기라니, 천만에요.
당시는 35세인 김성동씨를 비롯 최예덕 서상필 서상오 조화수 송동오등
30대의 변사들이 장안기생들에게 최고인기가 있을 정도로 변사의 유명세는
대단하던 시절이었지요.
변사의 월급은 1회 상영에 쌀 세가마 값인 1백50~2백전을 받을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그중에 14살인 저는 최연소 조수, 일명 "빵꼬마와시"(스페어)여서 월급도
제대로 못받았지요.
그래도 제가 출연하는 포스터엔 "천재소년 변사 신현군을 들어보셨나요"
라는 광고문구를 넣어 주었는데 그때 가명인 신현이란 이름을 썼지요.
평양 원산 함흥 원주 제천 대구 부산 울산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그런 조수변사 노릇도 서울의 우미관에서 "이젠 네 갈 데로 가라"는 김씨의
말과 함께 끝이 났지요.
-조수 생활을 그만두고 곧바로 본격적인 변사생활에 들어갔습니까.
<> 신변사 =기거하던 우미관에서 나온 저는 다시 평양 집에 돌아왔으나
아버님이 중풍에 걸리자 계모가 의붓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예전처럼 선교리 가설극장의 청소일로는 약시중은 커녕 쌀값을 마련할
수도없어 아버님을 모시고 조선영화(주)경성배급소 영사기사로 일하던
서울의 큰형에게로 가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뒤 해방이 되고 큰형은 영사기사로, 권투선수 출신인 작은형은
기도주임을, 저는 변사를 각각 맡아 우리 3형제가 본격적으로 무성영화
상영팀이 돼 전국을 순회했습니다.
-참, 신출이란 예명은 언제부터 썼나요.
<> 신변사 =8.15해방전후에 "신불출"이란 유명한 만담가겸 변사가 있었는데
이사람이 6.25때 이북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큰형이 "신불출이가 북으로 갔으니 이제 천재소년 신출이가
나왔다"며 신불출과 비슷한 이름인데다 신가에서 새로 나왔다는 뜻으로
제게 "신출"이란 예명을 붙여줬지요.
"심청전"상영 때 처음 그 예명을 썼지요.
-변사 뿐아니라 대중예술가의 생활은 결국 관객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자신의 변사시절 인기가 어느 정도였다고
평가하십니까.
<> 신변사 =자화자찬 같습니다만 해방후 "임자없는 나룻배" 나운규 주연의
"아리랑" "사나이" "수험료" "장화홍련전" "홍길동전"등의 필름을 메고
전국을 돌면서 상영을 했는데 반응이 대단했답니다.
특히 "검사와 여선생"같은 무성영화는 현재의 중앙극장에서 개봉을 했는데
하루에 4~5회씩 상영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게다가 돈암동의 동도극장에서도 30분 늦게 동시상영을 했는데 필름이
복사가 안되던 때라 한 쪽에서 일부 상영하고 잠시 문화영화나 뉴스를
돌리고 있으면 그 때를 이용해 자전거를 타고 다른 극장에 달려가 변사를
해주던 기억도 납니다.
-인기가 대단했던 만큼 돈도 많이 벌었겠습니다.
<> 신변사 =그땐 무성영화가 유일한 대중오락이었기 때문에 흥행이 잘
됐지요.
영화상영 사업에 재미를 본 우리 형제는 신출영배사란 영화배급회사를
차렸고 경기도포천에 향군극장을 직접 운영했지요.
부산 피란시절 결혼도 했고 돈도 많이 벌어 지금 서울 장충동 태극당
자리에 있던 저택을 구입할 정도였습니다.
이 무렵 인기있던 여배우들은 조미령, 노경희, 눈물의 여왕 전옥이었고
고교생이던 신영균이 데뷔했었지요.
그러던 것이 향군극장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전성기도 막을 내려버렸지요.
당시 보험이 없던 시절이라 도산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장충동 집을 비롯해 숟가락까지 전재산을 팔아 빚을 갚고나니 알거지가
되더군요.
남은 거라곤 필름 뿐이었지요.
재기를 위해 전국을 돌며 가설극장을 다시 시작했으나 시대의 조류는
이미 바뀌고 있었습니다.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이미 무성영화 시대는 막을 내렸고 TV의 등장으로
영화마저 불황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가셨는지요.
<> 신변사 =다행히 지난 69년 국무원 사무처 공보실의 영사기사로 들어가
지난 78년 퇴직할 때까지 "대한뉴스"를 찍거나 문화영화를 상영하러 지방을
다녔지요.
그 뒤엔 79년부터 개인택시 면허를 얻어 핸들을 잡다가 작년에 그만
뒀습니다.
-변사란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는데다 신선생님 말씀대로 임기응변식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다면 선천적인 자질 뿐아니라 관련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도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 신변사 =물론입니다.
영화와 관련되는 내용을 책을 통해 충분히 숙지하고 입으로 달달 욀 정도가
돼야 변사활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변사를 맡은 영화 뿐아니라 다방면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심지어 성경책까지 탐독했습니다.
-30년가까이 변사활동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도 많을텐데요.
<> 신변사 =일제시대 조수변사 시절에 원산에서 아리랑을 상영할
때였습니다.
영진이역의 나운규가 미쳤다가 제정신을 차렸으나 일본순사에 끌려가는
끝장면이었는데 그만 흥분해서 대사를 엉뚱하게 해버렸지요.
"영희야, 이 못난 놈은 미쳐서 사람을 죽여 끌려간다. 왜놈 순사들에게
묶여가 아버지를 못모시는게 천추의 한이로구나"하고 말입니다.
당장 맨앞 객석에 앉아 있던 고등계 형사가 뛰어올라와 저를 끌고
갔습니다.
3일간 유치장에 갇혀 실컷 얻어맞고 "누가 시켰느냐"는 추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무슨 배후가 있을 턱이 있나요.
사수이던 김성동씨가 서울에서 달려와 간신히 꺼내줬지요.
-대중예술에 종사하신 분으로서 혹시 판소리나 국악기 연주자처럼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는 길은 없는지요.
<> 신변사 =인간문화재라뇨. 변사로서 화려했던 과거는 잊어버렸어요.
요즘 세대들이야 어디 변사들의 말솜씨에 귀나 귀울이겠습니까.
1년에 한두번 대학같은 데서 초청이 오면 마누라가 제가 죽으면 관속에
넣는다고 보관하고 있는 "검사와 여선생"이나 "며느리 설움"의 필름을 들고
나가기는 하지만 제가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변사를 했던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습니까.
<> 신변사 =전혀 없습니다.
제가 좋아서 했던 직업이었고 나름대로 최고가 됐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신변사 =배경음악이 나올 때마다 저 장면에선 "아, 어찌하여 친엄마를
몰라보시나이까"등 변사 노릇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요.
대사와 음악보다는 변사의 묘미가 더욱 낫지요.
그런데 그건 제 생각이구요.
시대가 어디 그렇습니까.
< 대담 = 최종천 사회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