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609) 제3부 정한론 : 반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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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군의 장은 처량하였다.
하야시에게 거의 떠밀리다시피 해서 그와 헤어진 에도는 앞일이 난감했다.
도사로 올때는 하야시에게 봉기를 촉구해 보고,여의치 않으면 그에게
은신처라도 제공해 주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은신처는 고사하고,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으니, 다른 데보다
감시가 한결 더한 이곳을 떠나 딴 고장으로 가는게 좋겠다는 말까지
들었던 것이다.
원군은 거절했을 망정 사이고는 욕실에서 등도 밀어주고, 술대접도 푸짐
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하룻밤 게이샤와 즐길수 있도록까지 위로를 해
주었는데, 하야시란 놈은 자기를 찾아온 것부터가 싫은 듯 냉대였으니,
에도는 분하고 괘씸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패군의 장은 그저 탄식이 있을 뿐이었다.
"도쿄로 가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구나. 아-"
사이고가 도쿄로 가서 직접 메이지천황 앞으로 탄원서를 제출하라고
했었지만, 에도는 도쿄로 가는 일은 호랑이에게 먹히려고 제발로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으로 그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에도는 도쿄로 가는 선편을 물색하려고 이곳 저곳 어촌을 찾아다니다가
고노우라(갑지포)라는 곳에서 수상히 여긴 주민의 밀고로 결국 순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꽁꽁 묶인 몸이 되어 에도는 곧바로 사가로 압송되어 갔는데, 이미 시마를
비롯한 간부들 대부분이 체포되어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오쿠보는 에도가 붙들려 오자, 즉시 재판을 개최토록 했다.
여전히 자기는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뒷전에서 지시만 하여 전원에게
참수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그날로 형을 집행해 버렸다.
전격 재판에 전격 판결, 전격 집행이었다.
에도를 비롯하여 모두 열한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그 머리
열한개를 장대 끝에 꽂아서 일반에 공개했다.
죽은 자에게 또 한번 치욕을 안겨주는, 형벌중에서 가장 잔인한 효수였다.
그런데 오쿠보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한술 더 떴다.
그 열한개의 효수를 하나 하나 사진으로 찍어서 전국의 현청 소재지에
설명을 곁들여 게시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의 말로는 이렇다고, 불만 사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사진들을 본 사족들은 두려워하기 보다 오히려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놈, 오쿠보, 어디 보자. 미구에 네놈도 저런 꼴이 되고야 말테니..."
이런 식으로 서슴없이 내뱉으며 이를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1일자).
하야시에게 거의 떠밀리다시피 해서 그와 헤어진 에도는 앞일이 난감했다.
도사로 올때는 하야시에게 봉기를 촉구해 보고,여의치 않으면 그에게
은신처라도 제공해 주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은신처는 고사하고,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으니, 다른 데보다
감시가 한결 더한 이곳을 떠나 딴 고장으로 가는게 좋겠다는 말까지
들었던 것이다.
원군은 거절했을 망정 사이고는 욕실에서 등도 밀어주고, 술대접도 푸짐
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하룻밤 게이샤와 즐길수 있도록까지 위로를 해
주었는데, 하야시란 놈은 자기를 찾아온 것부터가 싫은 듯 냉대였으니,
에도는 분하고 괘씸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패군의 장은 그저 탄식이 있을 뿐이었다.
"도쿄로 가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구나. 아-"
사이고가 도쿄로 가서 직접 메이지천황 앞으로 탄원서를 제출하라고
했었지만, 에도는 도쿄로 가는 일은 호랑이에게 먹히려고 제발로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으로 그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에도는 도쿄로 가는 선편을 물색하려고 이곳 저곳 어촌을 찾아다니다가
고노우라(갑지포)라는 곳에서 수상히 여긴 주민의 밀고로 결국 순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꽁꽁 묶인 몸이 되어 에도는 곧바로 사가로 압송되어 갔는데, 이미 시마를
비롯한 간부들 대부분이 체포되어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오쿠보는 에도가 붙들려 오자, 즉시 재판을 개최토록 했다.
여전히 자기는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뒷전에서 지시만 하여 전원에게
참수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그날로 형을 집행해 버렸다.
전격 재판에 전격 판결, 전격 집행이었다.
에도를 비롯하여 모두 열한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그 머리
열한개를 장대 끝에 꽂아서 일반에 공개했다.
죽은 자에게 또 한번 치욕을 안겨주는, 형벌중에서 가장 잔인한 효수였다.
그런데 오쿠보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한술 더 떴다.
그 열한개의 효수를 하나 하나 사진으로 찍어서 전국의 현청 소재지에
설명을 곁들여 게시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의 말로는 이렇다고, 불만 사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사진들을 본 사족들은 두려워하기 보다 오히려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놈, 오쿠보, 어디 보자. 미구에 네놈도 저런 꼴이 되고야 말테니..."
이런 식으로 서슴없이 내뱉으며 이를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