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장탐구] (2) 돈의 마술사..건당 100억원대 주물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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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별을 달면 계급장을 비롯 50여가지가 바뀐다.
은행임원도 비슷하다.
더구나 은행장은 말할 것도 없다.
의전부터가 달라진다.
관직은 아니지만 "공인"으로 분류된다.
금융의 공공적 성격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돈줄을 쥐고 기업의 생사를 완전히 좌우할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한국상업은행 정지태" 정지태상업은행장의 명함은 이렇다.
직책도 적혀있지 않다.
전화번호 한줄 없다.
"정지열"로 읽히는 수가 곧잘 있어 괄호안에 "정지태"라는 한글을 따로
표기한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그는 지난해초 "행장대행"이란 꼬리를 떼면서 명함을 이렇게 간단히
바꿨다.
명함만이 아니다.
방도 넓어졌다.
집무실만도 30평에 달한다.
접견실 2개는 별도다.
"공식적"인 업무추진비도 월1천만여원으로 껑충 뛰었다.
3백만여원의 업무추진비에 10평남짓한 공간이 전부였던 전무때하곤 하늘과
땅차이다.
비서실장을 비롯 여비서 2명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자처럼 따르는
수행비서역도 생겼다.
만나는 사람들의 격도 몇단계 높아졌다.
"세 발자욱"이상 걷는 법도 없다.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은행에 갈때도, 롯데호텔에 들를 때도 반드시 전용차
(그랜저3.0)를 이용한다.
그런가하면 술마신 다음날엔 반드시 찾던 서울명동의 따로국밥집에 발길도
끊었다.
하다못해 일요일 등산길에서조차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이 드러나는걸
꺼린다.
이처럼 은행장이라는 타이틀은 곧 공인이 됐다는걸 뜻한다.
다른 조직의 수장과는 달리 김맥을 틀어쥔 은행장이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지난 81년 초겨울 어느날.
점심시간이던 오후12시30분경 안영모 당시 한일은행장실에선 난데없는
폭파음이 울려퍼졌다.
은행표현대로하면 "웬 이상한 사람"이 사제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안행장은 다행히 화를 면했지만 강모비서역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상한 사람이 은행장실에서 폭탄을 터뜨린 이유는 바로 돈이었다.
"돈을 내놓아라"는게 범인의 요구였다.
그후로 한일은행장의 수행비서는 비서실장으로 높아졌고 일정표는 철저한
보안사항이 됐다.
이 사건에서 보듯 아무리 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은행장이 돈줄을 쥐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은행장이 움직이는 돈은 얼마나 될까.
대형시중은행의 경우 대출잔액은 16조여원에 달한다.
1년에 신규승인대출액이 3-4조원.
여기에 만기가 돌아와 갱신하는 대출까지 따진다면 약6조여원이 1년동안
승인된다.
물론 이 모두가 은행장승인사항은 아니다.
대형은행의 경우 건당 1백억원이상, 후발은행의 경우 건당 50억원이상이
은행장 전결사항이다.
나머지는 전무이하가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다.
적어도 규정에는 그렇게 돼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10억원이상이 넘으면 은행장에게 보고하는게 관행이다.
거꾸로 은행장의 지시라면 1억원이하의 대출도 그자리에서 이뤄지는게
보통이다.
한마디로 맘먹기에 따라서는 은행돈 전부를 주무룰수 있다고 보면 된다.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갖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91년 6월초 두 개의 상장기업이 같은날 사실상 부도를 냈다.
봉제의류수출업체인 대미실업은 6월1일 신탁은행에 돌아온 어음을 제때
결제하지 못했으나 긴급자금대출로 회생했다.
반면 같은날 부도위기에 몰렸던 주차설비제조및 모피의류업체인 우단은
외환은행에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처리됐다.
영업실적이 더 좋다고 할수 없는 대미실업은 살아난 반면 우단이 쓰러진
이날의 "사건"을 두고 금융계에서는 "행장의 실력행사결과"라고 수근거렸다.
예는 얼마든지 있다.
지난해 4월 물러난 박기진제일은행장이 동생회사(학산산업개발)에 4백억원
이상을 긴급대형식으로 지원해 수명을 6개월이상 연장시킨 것이나 정지태
상업은행장이 한양과 봉명그룹을 두부모베듯 정리해버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시절만해도 은행장이 되기 위한 "공정가격"은 30억원
이었다는게 금융계의 속설이다.
"본전"은 은행장이 된지 1년만에 고스란히 챙겼다고 한다.
"본전"의 원천이 기업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사생활에서 사회적 물의를 야기한 적이 있거나 여신운용과 관련하여
특정거래 기업등의 이익을 대변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는 은행장이
될 수 없다"
은행감독원의 "은행장선임에 관한 지침(제4조2항)"은 이렇게 못박고 있다.
과연 이 시간에 은행장들은 어떤 기업을 놓고 살릴까 죽일까하는 "불쾌
하지만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 하영춘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8일자).
은행임원도 비슷하다.
더구나 은행장은 말할 것도 없다.
의전부터가 달라진다.
관직은 아니지만 "공인"으로 분류된다.
금융의 공공적 성격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돈줄을 쥐고 기업의 생사를 완전히 좌우할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한국상업은행 정지태" 정지태상업은행장의 명함은 이렇다.
직책도 적혀있지 않다.
전화번호 한줄 없다.
"정지열"로 읽히는 수가 곧잘 있어 괄호안에 "정지태"라는 한글을 따로
표기한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그는 지난해초 "행장대행"이란 꼬리를 떼면서 명함을 이렇게 간단히
바꿨다.
명함만이 아니다.
방도 넓어졌다.
집무실만도 30평에 달한다.
접견실 2개는 별도다.
"공식적"인 업무추진비도 월1천만여원으로 껑충 뛰었다.
3백만여원의 업무추진비에 10평남짓한 공간이 전부였던 전무때하곤 하늘과
땅차이다.
비서실장을 비롯 여비서 2명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자처럼 따르는
수행비서역도 생겼다.
만나는 사람들의 격도 몇단계 높아졌다.
"세 발자욱"이상 걷는 법도 없다.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은행에 갈때도, 롯데호텔에 들를 때도 반드시 전용차
(그랜저3.0)를 이용한다.
그런가하면 술마신 다음날엔 반드시 찾던 서울명동의 따로국밥집에 발길도
끊었다.
하다못해 일요일 등산길에서조차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이 드러나는걸
꺼린다.
이처럼 은행장이라는 타이틀은 곧 공인이 됐다는걸 뜻한다.
다른 조직의 수장과는 달리 김맥을 틀어쥔 은행장이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지난 81년 초겨울 어느날.
점심시간이던 오후12시30분경 안영모 당시 한일은행장실에선 난데없는
폭파음이 울려퍼졌다.
은행표현대로하면 "웬 이상한 사람"이 사제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안행장은 다행히 화를 면했지만 강모비서역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상한 사람이 은행장실에서 폭탄을 터뜨린 이유는 바로 돈이었다.
"돈을 내놓아라"는게 범인의 요구였다.
그후로 한일은행장의 수행비서는 비서실장으로 높아졌고 일정표는 철저한
보안사항이 됐다.
이 사건에서 보듯 아무리 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은행장이 돈줄을 쥐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은행장이 움직이는 돈은 얼마나 될까.
대형시중은행의 경우 대출잔액은 16조여원에 달한다.
1년에 신규승인대출액이 3-4조원.
여기에 만기가 돌아와 갱신하는 대출까지 따진다면 약6조여원이 1년동안
승인된다.
물론 이 모두가 은행장승인사항은 아니다.
대형은행의 경우 건당 1백억원이상, 후발은행의 경우 건당 50억원이상이
은행장 전결사항이다.
나머지는 전무이하가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다.
적어도 규정에는 그렇게 돼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10억원이상이 넘으면 은행장에게 보고하는게 관행이다.
거꾸로 은행장의 지시라면 1억원이하의 대출도 그자리에서 이뤄지는게
보통이다.
한마디로 맘먹기에 따라서는 은행돈 전부를 주무룰수 있다고 보면 된다.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갖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91년 6월초 두 개의 상장기업이 같은날 사실상 부도를 냈다.
봉제의류수출업체인 대미실업은 6월1일 신탁은행에 돌아온 어음을 제때
결제하지 못했으나 긴급자금대출로 회생했다.
반면 같은날 부도위기에 몰렸던 주차설비제조및 모피의류업체인 우단은
외환은행에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처리됐다.
영업실적이 더 좋다고 할수 없는 대미실업은 살아난 반면 우단이 쓰러진
이날의 "사건"을 두고 금융계에서는 "행장의 실력행사결과"라고 수근거렸다.
예는 얼마든지 있다.
지난해 4월 물러난 박기진제일은행장이 동생회사(학산산업개발)에 4백억원
이상을 긴급대형식으로 지원해 수명을 6개월이상 연장시킨 것이나 정지태
상업은행장이 한양과 봉명그룹을 두부모베듯 정리해버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시절만해도 은행장이 되기 위한 "공정가격"은 30억원
이었다는게 금융계의 속설이다.
"본전"은 은행장이 된지 1년만에 고스란히 챙겼다고 한다.
"본전"의 원천이 기업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사생활에서 사회적 물의를 야기한 적이 있거나 여신운용과 관련하여
특정거래 기업등의 이익을 대변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는 은행장이
될 수 없다"
은행감독원의 "은행장선임에 관한 지침(제4조2항)"은 이렇게 못박고 있다.
과연 이 시간에 은행장들은 어떤 기업을 놓고 살릴까 죽일까하는 "불쾌
하지만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 하영춘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