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대한 청탁은 앞으로 절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지난해 4월 김영삼대통령은 이용성은행감독원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대통령의 당부말은 뒤집어보면 이전까지는 인사나 대출청탁이 횡행했다는걸
뜻한다.

청탁과 외압-.

이는 은행발전에는 해악이 될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도 은행장의 주요 역할중의 하나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수명과도 직결되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86년 설립된 백진무역은 한때 재계에서 "다크호스"로 꼽혔었다.

(주)논노의 하청기업으로 성장을 거듭한 이력에 비춰보면 중견기업으로
자리잡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이 회사의 현모사장은 당시 정계의 실세 P의원의 처남.

위치가 이렇다보니 은행들의 지원은 경쟁적일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회사의 명운은 싱겁게 끝났다.

P의원이 "실세"로 전락하자마자 백진무역도 신한.중소기업.서울신탁.한미
은행등에 돌아온 30억원을 막지못해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P의원의 힘을 빌려 은행장에 올랐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정상적인 금융지원이 가능했겠습니까"

한 은행장의 반문은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충분한 "외압"의 실체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은행장에 대한 외압의 주종은 역시 대출관련이다.

특정기업에 돈을 빌려주라는 것이다.

부실기업이 쓰러질 때마다 후견인이 들먹여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또 국제그룹붕괴나 현대그룹에 대한 여신금지와 같이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것도 대출관련 외압에 다름아니다.

권위주의시절의 은행장들은 이런 외압에 속수무책이었다.

자신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실력자"의 이름만 대도 주눅들기 일쑤였다.

지난81년10월 조흥은행의 허종욱비서실장은 당시 임재수행장에게 "더이상
장영자씨와 접촉하지 마십시오.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고 직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실장은 이듬해 3월 한직지점장으로 발령나고 말았다.

그리고 1개월도 안돼 장씨사건이 발생했다.

장씨가 내세운 "배경"에 임행장이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는게 은행내부의
지적이다.

외압은 물론 대출청탁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임원선임에서부터 부장이나 지점장 승진, 심하면 신입행원채용까지 다양한
인사청탁도 빼놓을수 없다.

뿐만 아니다.

점포입주등 자질구레한 민원도 많다.

지난 86년 이광수당시중소기업은행장은 서울동교동지점의 입주건물을
지정했다.

실무자들이 점주권을 고려하면 그 건물은 신설점포로써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그 건물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다름아닌 임모의원.

국회재무위원이었던 임의원의 압력이 통했다는게 당시 실무자들의 얘기다.

결국 이 지점은 지난해 5월 다른 건물로 이사했다.

이런 외압에 굴하지 않기 위해선 더 큰 힘이 필요했다.

나응찬신한은행장은 내외적으로 "청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통한다.

그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김준성전부총리조차 "내가 인사청탁을 해도 들어
주지 않더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한은행이 외형에 비해 부실여신이 적은 것은
상당부분 창립공신인 나행장의 공로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나행장의 원칙고수도 이희건회장이라는 방패막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게 지배적이다.

나행장은 대구은행비서실장시절인 지난 75년 김준성당시대구은행장을
통해 이희건일본대판신용조합회장을 만난다.

이 인연으로 그는 77년 제일투자금융설립에 참여하고 이어서 82년 신한
은행설립을 주도한다.

이 과정에서 생긴 이회장의 나행장에 대한 신뢰와 이회장 특유의 로비력이
나행장에게 외압을 방지하는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다.

문민정부들어 외압에 대한 은행장들의 태도도 사뭇 달라졌다.

정지태상업은행장은 지난해10월 부실거래기업인 봉명.도투락을 정리하는
단안을 내렸다.

소유주가 이승무민자당의원이란걸 감안하면 이전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정행장은 이의원의 친형인 이병무아시아시멘트회장이 보증을 서면
지원해 주겠다는 기지를 발휘해 외압을 극복했다.

이는 문민정부들어 적어도 "실세"들의 외압은 사라졌다는걸 뜻한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권, 즉 국회의원들의 외압은 계속되고 있다는게 행장들
의 얘기다.

그래서 국정감사장에 참고인자격으로 출석한 은행장들은 "또 무슨 청탁을
하려고 저러나"라는 혼잣말을 내뱉곤 한다.

은행경영의 최종 책임자는 역시 은행장이다.

이들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아니면 좀 더 높은 자리로의 도약을
위해 외압에 굴한다면 은행은 부실투성이가 되고 만다.

그리고 결국엔 은행장의 수명도 단명으로 끝나고 만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