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러시아가 모를 턱이 없어서 그들은 일본보다
일찍부터 가라후도의 개척에 힘써 왔고, 천명이 훨씬 넘는 군대를 파견하기
까지 했다.

동부 시베리아 총독인 무라비요프는 자신이 직접 가라후도를 시찰하고,
하코도마리에 관청을 설치했는데, 일본이 구춘고단에 행정기관을 두기
3년전의 일이었다.

러시아가 매사에 선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군대를 북쪽에서 일본인들이 정착해 있는 남쪽으로 이동시켜 배치
했다.

가라후도를 전부 자기네 손아귀에 넣으려는 포석이었다.

그런 정보를 일본 정부보다 영국공사 퍼크스가 먼저 입수했다.

퍼크스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들은 일본 정부의 고관들은 어떻게 대응했으면
좋을지를 몰랐다.

감히 러시아와 맞서기 위한 군대 파견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질 못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는 바다로 부터는 영국이고, 뭍으로부터는
러시아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퍼크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했다.

내심 한심하게 생각한 퍼크스는,

"내가 보기에는 이미 가라후도는 러시아의 세력권 안에 들어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곳을 포기하고, 홋카이도나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튼튼히
가꾸어 확보해 나가는게 옳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힘을 빌려 가라후도 전역이 러시아의 소유가 되는 것을 막아보려던
일본은 실망하여 이번에는 미국공사인 더롱그에게 매달려 보았다.

그 역시 비슷한 의견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북태평양의 어업을 중시해야 합니다. 가라후도의 개척보다
그 편이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이 많거든요. 눈에 뒤덮여 거의 쓸모없는
가라후도는 러시아에 양보해도 무방할 거예요"

이런 말을 따를 수는 없어서 일본 정부에서는 직접 러시아 측에 가라후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남쪽은 일본이, 북쪽은 러시아가 차지하도록 하자는
제안도 했고, 대금을 지불하고 가라후도를 사겠다, 반대로 그게 싫으면 그
쪽에서 돈을 내고 사라는 제의도 해보았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다 거절이었다.

어떻게든지 자기네가 무상으로 가라후도 전토를 차지하겠다는 배짱이었다.

그렇게 밀고 당기듯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내 러시아 측에서
도발을 감행했다.

일본인들의 거주지인 구춘고단을 러시아군대가 점령을 했고, 백주에
병사들이 일본의 행정관서에 불을 질렀다.

그 불을 끄려는 일본인들에게 병사들은 돌을 던져 방해하였다.

무기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명백한 도전이었다.

1873년, 메이지 6년 3월의 일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