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렇게 러시아측에 넘겨주었던 가라후도를 일본은 30년뒤 노일전쟁에
승리하여 북위 50도 이남은 도로 찾게 된다.

그러나 다시 40년 뒤에는 제2차 세계대전, 즉 일본으로서는 소위 대동아
전쟁에 패하여 남쪽 가라후도뿐 아니라,지시마열도까지 모조리 러시아,
그때는 소련에게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오쿠보는 대만 문제에 이어 가라후도 문제까지 해결되자 눈위의 혹 세개
가운데 두개가 떨어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조선국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문제였다.

남은 혹 하나도 이 기회에 깨끗이 떼내버리기로 그는 마음을 굳혔다.

잠자는 사자라는 청나라도 굴복시켰는데 조선국 따위야...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만만한 오쿠보는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가 전면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정변까지 일으켜 정한파를 모조리 몰아낸 터인데, 불과 2년도 안되어 자신
이 정한에 앞장서게 되면 비난이 이만저만 아닐게 뻔했던 것이다.

특히 사이고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자칫하면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서 무력봉기를 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만 정벌과는 성격이 또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오쿠보는 그 일의 추진을 태정대신인 산조에게 은밀히 부탁했다.

산조도 속으로는 오쿠보가 좀 못마땅하긴 했으나 2년전과는 국정의 형편이
크게 달라진 셈이니, 누가 실권자라도 이제 조선국 문제에 손대지 않을수
없다는 판단하에 쾌히 떠맡았다.

산조는 먼저 우대신인 이와쿠라와 상의를 했고, 그리고 외무경인 데라지마
를 자기의 집무실로 불러 세사람이 자리를 같이했다.

집무실 문을 안으로 닫아 걸고 산조는 먼저 데라지마의 의향을 떠보았다.

"대만문제의 해결에 이어서 이제 가라후도 문제까지 매듭을 지었소. 외교적
으로 남은 문제는 조선국과의 관계뿐이오. 데라지마공은 외무경으로서
조선국문제에 대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소?"

데라지마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일이라는 듯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조선국이 우리의 뜻에 따르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래부에 갔던 모리야마가 얼마전에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역시
동래부사와의 면담을 거절당했다는 것입니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산조 도노께서도 말씀하신대로 대만 문제와 가라후도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는 조선국에 대해서 강력한 정책을 써야지요. 그러잖아도
다음 각료회의때 그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