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무라는 일차로 운요마루를 비롯해서 가스가마루, 데이보마루 세척을
보냈고, 뒤이어 모 마루, 다카오마루 두척을 더 출항시켰다.

임무는 조선국 삼면의 해역을 측량하는 일이었다.

운요마루의 함장인 이노우에만 비밀임무를 간직하고 있을 뿐, 다른 함장들
은 모두 측량이 목적인 줄 알고 있었다.

다섯척의 군함은 일단 동래부 쪽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왜관을 근거지로
삼아 교대로 반도 삼면의 해역을 측량했고, 때로는 합동으로 기동연습을
실시하기도 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기동연습이긴 했으나, 조선국에 대하여 당장 어떤
위협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대가 일상적으로 실시하는 훈련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어느 모로나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조선국측에서는 물론 경계의 눈초리를 번뜩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해 가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운요마루도 한가로이 나가사키에 되돌아가 쉬었다가 다시 나타나는
식이었다.

누가 보아도 어떤 목적을 수행하러 온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완벽한 위장작전이었던 셈이다.

반도의 산야에 가을빛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는 9월중순이었다.

한척의 군함이 조용히 서해를 북상하고 있었다.

운요마루였다.

물론 때때로 해안에 정박하여 바다의 수심을 재기도 했다.

"조선국의 가을은 정말 좋다니까. 오늘은 하늘이 유난히 높고 푸르군"

함장 이노우에 소좌가 갑판 위에 서서 망원경으로 뭍 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듯 감탄을 했다.

그 말을 받아서 옆에 섰던 젊은 보좌관인 스기다소위가 말했다.

"함장님, 마치 우리가 조선국의 가을하늘 구경을 하러 온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측량이나 하고 다니는 겁니까?"

"왜? 측량이 싫은가?"

"싫다기보다도. 대만을 정벌해서 청나라도 굴복시켰는데, 왜 조선국은
가만히 내버려두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드려보는 말씀입니다. 우리 함대가
출항해 올때 저는 속으로 이제 조선국에 대해서 작전을 개시하는구나
싶었는데, 보니까 그게 아니어서 솔직히 말씀드려 실망입니다"

"전쟁을 하고 싶다 그거군. 맞지?"

"예. 맞습니다"

"대만 정벌에 참전했던가?"

"아닙니다. 저는 금년 봄에 소위로 임관이 됐지요"

"아, 그렇지. 지금 몇살이더라?"

"스물한살입니다"

"참 좋은 때군. 전쟁이 하고 싶은 나이지. 허허허..."

이노우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