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업계의 톱메이커인 농심은 지난달 개장한 프라이스클럽에 라면을
공급하다가 이달부터 거래를 그만두었다.

"메이커의 공급가격은 할인점이나 특약점이나 같지만 할인점에서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가격이 특약점의 산매상에 대한 공급가격보다 싸다
보니 할인점주변의 특약점들이 배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거래를 그만두게된 배경에 대한 농심관계자의 설명이다.

농심이 신라면 1상자(30개들이)를 프라이스클럽과 특약점에 넘기는 가격은
6천2백70원.

타회사의 대리점격인 특약점은 이를 산매상에 6천6백-6천7백원에 넘기는데
프라이스클럽에서는 회원들에게 6천5백원에 팔았다.

그러다보니 특약점의 반발이 거세졌고 영업조직이 흔들릴 우려가 높아지게
됐다.

특히 주변상권의 특약점은 사정이 심각했다.

농심이 프라이스클럽을 통해 지난달 7일부터 말일까지 판매한 라면은 모두
4천5백여만원어치.

이기간중 프라이스클럽과 상권이 겹치는 영등포주변 6개의 특약점뿐 아니라
마포, 관악등 인접지역의 10여개 특약점까지도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할수
없었다는게 농심의 설명이다.

월간 8천만-1억원의 외형을 올리는 기존의 특약점들을 무더기로 고사위기에
몰아넣느니 할인점을 포기할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농심의 변이다.

가격파괴의 바람을 지켜보는 제조업체들의 심경은 한마디로 "착잡"하다.

할인점들의 납품가인하 요구, 유통업계 내부에서 불거진 마찰이 몰고온
뜻하지 않은 불똥, 기존판매조직의 동요등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대리점공급가보다 4%나 싼 가격을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다가는 10여년
넘게 가꿔온 판매망이 송두리째 흔들릴수 밖에 없습니다"(D산업 Y이사)

특히 할인점의 매출구성비가 높은 식품, 생활용품의 제조업체들은 현찰,
대량구매를 앞세운 할인점들의 제의에 구미가 당기면서도 그로 인해 빚어질
판매조직의 이탈과 혼란을 감당해 내기 어려운 입장이다.

이같은 사정은 한두업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뚜기식품, 동원산업, 남양유업등 할인점입점을 놓고 주판알을 퉁기고
있는 대다수업체가 거의 똑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

강력한 자체 판매망을 구축해 놓고 있는 업체일수록, 시장점유율이 높은
업체일수록 고민은 크다.

롯데백화점이 최근 일부 제조업체들에 대해 프라이스클럽 납품가와의
차별을 시정해 달라고 요구한데서 알수 있듯이 유통업체간의 갈등이
제조업체들에게는 가격파괴시대의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자-대리점(특약점)-산매상으로 이어져 온 상품흐름의 틀을
깨기 시작한 가격파괴의 물결속에서 변화에 적응하려는 제조업체들의
움직임도 확산되고 있다.

포장과 규격을 달리해 기존유통업체들과 판매경로를 차별화한 상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제일제당이 할인점용으로 1kg짜리 다시다를 2kg으로 늘려 납품하거나
럭키가 50g짜리 죽염치약을 40개씩 1상자에 넣어 프라이스클럽에서
판매하는등 제조업체들의 대응전략이 나타나고 있다.

"할인점의 수가 늘어나고 그에 비례해 바잉파워가 커지면 커질수록
제조업체들은 중간유통구조를 가지기 힘들게 되고 기존의 대리점체제도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하일 프라이스클럽점장은 가격파괴의 바람이 거스를수 없는 시대적변화
라고 전제, "국내유통시장도 선진국처럼 제조와 유통이 분리되고
판매업자들이 시장을 주도하게 될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제조업체의 매출에서 할인점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미미한 탓에
제조업체들이 가격파괴의 진원지인 할인점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마디로
"계륵"이라고 표현할수 있을것 같다.

먹을 것은 별로 없으면서도 버리기엔 아까운 존재와 같은 할인점이 앞으로
늘어날때 고민에 빠진 제조업체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많을것 같다.

<양승득기자>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