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권 전권 하는데,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구려. 전권변리대신
이라니, 우리나라에는 그런 직함 자체가 없소. 한 나라의 전권은 국왕
에게 있는 것이지, 어찌 한낱 대신이 그 전권을 가진단 말이오?"

신헌은 수염이 너불너불하고, 외모가 의젓한 사대부였다. 점잖게, 그러나
단호히 받아넘겼다.

머리를 짧게 깎은데다가 코밑과 턱주가리에 새까만 수염이 돋아나서
깐깐해 보이는 인상인 구로다는 질세라 미간을 약간 찌푸려가며
지껄였다.

"전권변리대신이란 항상 전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전권을 위임 받은 사신이란 말이오. 그래서 회담에서 가타 부타
판단을 내려 맺을 것은 맺고, 끊을 것은 끊을게 아니겠소"

"그거야 바다를 건너 회담을 하러 찾아왔을 경우에는 그래야 되겠지만,
우리는 그게 아니잖소. 한양은 지척간이오. 접견대관인 내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면 조정에 문의해서 결정하면 되는 일이오. 회담
진행에 아무 상관이 없으니, 그런 격식문제는 따질 일이 못된다고
생각하오"

"국제간의 회담이란 격식부터가 중요한 것이오. 국제법의 규정에 보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 회담이 개최될 때는 전권을 위임받은 사람이 대표로
참석해야 된다고 되어 있소"

"국제법이니 뭐니 그런 것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 우리는 그저
지금까지 해 내려온 관례대로 할 따름이오"

구로다는 피식 코언저리에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뱉듯이 말했다.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있으니,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턱이
없겠죠. 좋아요. 도리가 없죠. 그 문제는 우리가 양보를 하겠소"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말하고, 구로다는 이제 본격적인 의제를
꺼냈다.

"귀국에 이미 두차례에 걸쳐 통보를 했듯이 본인이 전권변리대신으로
찾아온 것은 작년 가을에 이곳 강화도에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해결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요.

먼저 우리 운요마루를 포격한 사건에 대해서 물어 보겠소. 그 군함이
항해 도중 식수가 떨어져서 그것을 구하러 이 섬을 찾아와 단정으로
접근했다는데, 어찌하여 귀측 포대에서 발포를 했는지 알고 싶소. 물을
구하러 오는 배에 포격을 가하다니, 그것은 인도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닌가요?"

"귀측의 군함이 와서 닻을 내린 곳은 초지진 앞바다였소. 그곳은 한양의
물길 들머리가 되어 타국선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해역이오. 금지된
곳에 무단히 들어온 것부터가 잘못이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