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회담은 일본국측의 요구에 의해서 열렸다.

조선국측에서는 전날 구로다의 전쟁불사발언과 간밤의 위협포격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회담을 열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일본국측에서 간곡히 회담 속개를 요청해 와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신헌은 마지못해 참석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던 것이다.

구로다는 전날과 달리 은은한 미소까지 내비치는 그런 얼굴이었다.

구로다뿐 아니라 이노우에, 그리고 다른 수행원들도 모두 밝고 부드러운
표정들이었다.

두개의 얼굴 가운데서 오늘은 밝고 부드러운 쪽을 내밀기로 미리 저희끼리
말이 있었던게 틀림없었다.

"요 간사한 왜놈들 같으니라구"

근엄하게 굳어진 표정의 신헌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구로다를 똑바로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구로다는 여전히 미소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는 본관이 너무 격해진 나머지 속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는데, 첫날부터 좀 지나쳤던 것 같소. 그래서 오늘은 우리 일본측이
크게 양보를 하려고 하오. 우리 군함에 먼저 포격을 가한 그 사건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칠 용의가 있소. 그 대신 국교의 재개를 귀측에서 응해야
하오. 수호조약을 체결해서 앞으로 선린을 도모해 나가기로 한다면 일체의
과거지사, 즉 포격사건과 8년동안의 국서 접수 거부에 대하여 불문에
부치겠다는 말이오"

"그런 생각이라면 간밤에는 왜 그렇게 요란하게 포성을 울려댔나요.
도무지 귀측의 태도를 이해할수가 없구려"

신헌은 어떠한 위협앞에서도 따질 것은 따지고 넘어가야 된다는 배짱
이었다.

구로다의 표정이 다시 굳어들려 하자, 재빨리 이노우에가 입을 열었다.

"야간 기동훈련을 실시했을 뿐인 걸요. 우리나라 해군은 정기적으로
그렇게 야간에도 훈련을 실시하고 있어요"

"허-"

그렇게 답변하는 데는 뻔히 속이 들여다 보이지만, 굳이 더 할 말이
없어서 신헌은 약간 어이가 없는 그런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신헌의 그 헛웃음을 계기로 이노우에는 한결 더 나긋나긋한 표정을
지어가며 부드러운 어조로 이제 자기가 본격적으로 나설 때라는 듯이
수호조약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리 작성해 가지고 온 조약의 초안을 들추어 가면서 구체적인 설명을
해나갔다.

조선국측 참석자들의 듣고 있는 모습이 흡사 우이독경격이었다.

이노우에의 설명이 끝나자, 신헌은 거침없이 말했다.

"도대체 수호조약이라는 것이 뭔지 금시초문이구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