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곧 개국을 의미했다.

비단 일본과의 국교를 종전대로 회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서양 세력에
대해서까지 나라의 문을 열어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예로 보아서 그렇게 될게 틀림없다는 것을 조선국의 조정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가의 기본 정책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쉽사리 결론이 날 턱이 만무했다.

연일 중신들의 회의가 거듭되었으나, 논의가 분분할 따름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민비의 일족에 의한 세도정치가 서서히
펼쳐져 나가고 있는 때였다.

민씨 일당은 대원군과는 달리 일본에 대하여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측면도 없지가 않았다.

일본군의 대만 정벌이 있은 뒤로는 그런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다음은 조선 정벌로 나오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여전히 흥선대원군의 입김은 막강했고,
특히 유림을 대표하는 최익현 장호근등의 척화론, 즉 일본과의 화합을
배척하는 세력의 주장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우의정인 박규수와 당상역관 오경석등은 국제정세에 다소나마 눈을 뜬
터이라, 이 기회에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개국을 단행하는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폈다.

민비 일당 가운데서도 이최응 민규호 등은 국제적인 안목이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대원군에게 반대하는 입장에서 개국론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쉽사리 결론이 내려지지 않고 연일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는데,
때마침 청나라에 세자책봉사로 갔던 영의정인 이유원이 이홍장의 서신을
가지고 돌아왔다.

청나라의 직예총독이며 북양대신인 실권자 이홍장은 조선국에 대하여
개국을 권유하는 자기 의견을 그 서신 속에 적고 있었다.

만약 조선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면 자기네 청나라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다는 것이었고, 또 시대의 대세로 보아 이미 쇄국은 불가능하니,
개국함이 유리하다는 논지였다.

그 서신을 국왕인 고종까지 보게되어 마침내 개국 쪽으로 단안이 내려졌다.

곧 강화도의 접견대관에게 조속히 수호조약을 체결토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 갔고, 신헌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로로 회담을 성사 쪽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국제적인 조약 체결의 경험이 없는 터이라, 실무적인 면에서 의외로
일이 잘 진척되지 않아 한때는 다시 험악한 분위기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