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측에서 조약의 비준 문제를 제기하여 국왕의 서명과 날인을 요구했던
것이다.

조약의 비준이 뭔지 이해를 못하는 조선족측에서는 그저 국내에서 하고
있는대로 국왕의 윤허를 뜻하는 "윤"자만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여
서로 물러서려 하지 않아 결국 또 회담이 결렬 일보전까지 가고 말았다.

"다된 밥에 재를 뿌리려는 거요, 뭐요? 도대체 조약을 체결하면서 국제적
인 격식을 무시하려고 들다니 무슨 배짱이오?"

이렇게 내뱉고서 구로다는 숙소를 떠나 군함으로 돌아가고만 것이었다.

이노우에와 미야모토 등만 남아 밀고 당기는 협상을 계속했는데, 마침내
국왕의 친필 서명 대신 ''조선국주상지보''라는 어인을 새로 새겨 날인하고,
조인과 동시에 비준 절차는 따로 밟지 않고서 그 자리에서 바로 조약문서를
교환하는 것으로 끝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구로다가 군함을 이끌고 찾아온지 보름만에 조선국의 닫혀있던 빗장은
열리게 되고만 것이었다.

1876년 2월 27일, 조인식은 거행되었다.

강화부의 연무당에서였고, 조약은 12개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대에 와서 조선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조약인데, 그 제1조에 조선국
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항은 얼른 보면 매우 공평하고 정당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속에 일본국의 음흉한 저의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국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고, 독립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조약
문서에 밝혀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차후에 청나라의 간섭과 개입을 막을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저의를 알 턱이 없는 조선국측에서는 그 조항을 아주 기분좋은 것
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첫 조항에서 그처럼 조선국을 대우하는 것처럼 추켜올린 다음, 제2조에서는
양국은 사신을 파견하여 그 나라의 수도에 잠시건 오래건 기한에 상관없이
머무르며 통상과 기타 교섭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즉 공사관의 설치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4조와 5조에서는 지금까지의 교역항구인 동래부, 즉 부산의
초량항외에 두곳을 더 개항하여 일본 상인과 통상을 하고, 그 곳에 일본인
의 조계지를 만들수 있다고 하였다.

이 조항에 의해서 일본은 결국 제물포, 즉 인천과 원산 두 항구를 추가로
개항케 하여 그 곳에 자기네 조계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