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노박 박사] 독서대학 질의응답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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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는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깊이 받은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했다.
한가지 의문점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이 오늘날 왜 이처럼
기업이 번성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브라질은 가톨릭 국가인데도 그토록 가난하다는게 인상적이다.
일본은 가톨릭 뿐만아니라 개신교도 발을 붙이지 못했다.
또 한가지 의문은 일본은 과연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물질이 풍부하다고
해서 잘살고 있다고 할수 있는 것인지, 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물질적인
부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못살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설명해
달라.
"과거의 경제사를 돌이켜 보면 남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필리핀과 같은
많은 가톨릭 국가들은 가톨릭 윤리보다는 과거의 귀족주의적 전통을 추종
했다.
귀족들은 계급적 편견을 가지고 장인과 기능공 상인들을 경멸했다.
귀족들은 노동자와 상인계층이 오직 실용적인 것과 속된 이익만을 위한
일에 관계한다고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이같은 귀족주의적 편견이 가톨릭 국가들의 윤리적전통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라고 할수 있는 남미는 이렇다할 기업이나 산업이
없다.
귀하의 집에는 남미에서 개발되거나 제조된 제품이 몇개나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것이다.
가톨릭 교도는 일을 조롱하거나 상업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지적하고 있듯이 기독교인의 소명은 일에 대한
소명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체적 의식을 갖고 창조적으로 일에 동참해야 한다.
교황은 남미와 같은 가톨릭 국가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브라질 처럼 풍부한 천연자원이 없는 데도 부유한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될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를 주도한 것은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아니고
유교와 불교였다.
유교와 불교가 이지역의 거대한 인적자본을 창출했다.
자연 자원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적자본 혹은 인간정신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맥락에서 창조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갈파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다.
사람들을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만약
인간답게 살지못하고 탐욕적인 돼지처럼 산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풍요로움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 혹은
높은수준의 영적 생활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는 크나큰 비극이 될 것이다.
우리는 보다 높은 영적인 생활도 해야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 보면 현실적인 재물이라든지 부의 축적보다는 보다 영적이고
영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한 가르침과 기업활동과의 상반된 측면은 어떻게 해석할수 있는가.
교황이 얘기한 공동체로서의 기업활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업활동을
하다보면 서로 상충되는 측면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을수 있다.
"우선 기독교라는 종교는 앞으로 다가올 세상 혹은 다가올 심판에 대한
준비로서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기독교는 이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의미에서의 영적 종교가 아니다.
마치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육신 한 것처럼 우리의 소명은
이세상에 속한 것이고 이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성오거스틴이 말했듯이 당신 옆에 앉아 있는 한사람의 부자가 다른 사람들
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차 있을수 있다.
반면 다른 한편의 사람은 가난하게 보이지만 부자를 미워하는 증오와
시기심 혹은 탐욕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외관으로 사람을 판단할수 없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과부와 가난한자를 돌아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이것을 행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들에게
금전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더 좋은 길이 있다.
그것은 곧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땀으로 자신의 빵을 얻을수 있게 하고 더이상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변화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가난이라는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현대세계는 이러한 상황을 바꿀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갖게 됐다.
우리는 이일을 해야 한다"
< 정리=김병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일자).
발생했다고 했다.
한가지 의문점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이 오늘날 왜 이처럼
기업이 번성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브라질은 가톨릭 국가인데도 그토록 가난하다는게 인상적이다.
일본은 가톨릭 뿐만아니라 개신교도 발을 붙이지 못했다.
또 한가지 의문은 일본은 과연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물질이 풍부하다고
해서 잘살고 있다고 할수 있는 것인지, 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물질적인
부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못살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설명해
달라.
"과거의 경제사를 돌이켜 보면 남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필리핀과 같은
많은 가톨릭 국가들은 가톨릭 윤리보다는 과거의 귀족주의적 전통을 추종
했다.
귀족들은 계급적 편견을 가지고 장인과 기능공 상인들을 경멸했다.
귀족들은 노동자와 상인계층이 오직 실용적인 것과 속된 이익만을 위한
일에 관계한다고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이같은 귀족주의적 편견이 가톨릭 국가들의 윤리적전통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라고 할수 있는 남미는 이렇다할 기업이나 산업이
없다.
귀하의 집에는 남미에서 개발되거나 제조된 제품이 몇개나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것이다.
가톨릭 교도는 일을 조롱하거나 상업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지적하고 있듯이 기독교인의 소명은 일에 대한
소명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체적 의식을 갖고 창조적으로 일에 동참해야 한다.
교황은 남미와 같은 가톨릭 국가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브라질 처럼 풍부한 천연자원이 없는 데도 부유한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될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를 주도한 것은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아니고
유교와 불교였다.
유교와 불교가 이지역의 거대한 인적자본을 창출했다.
자연 자원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적자본 혹은 인간정신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맥락에서 창조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갈파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다.
사람들을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만약
인간답게 살지못하고 탐욕적인 돼지처럼 산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풍요로움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 혹은
높은수준의 영적 생활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는 크나큰 비극이 될 것이다.
우리는 보다 높은 영적인 생활도 해야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 보면 현실적인 재물이라든지 부의 축적보다는 보다 영적이고
영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한 가르침과 기업활동과의 상반된 측면은 어떻게 해석할수 있는가.
교황이 얘기한 공동체로서의 기업활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업활동을
하다보면 서로 상충되는 측면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을수 있다.
"우선 기독교라는 종교는 앞으로 다가올 세상 혹은 다가올 심판에 대한
준비로서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기독교는 이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의미에서의 영적 종교가 아니다.
마치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육신 한 것처럼 우리의 소명은
이세상에 속한 것이고 이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성오거스틴이 말했듯이 당신 옆에 앉아 있는 한사람의 부자가 다른 사람들
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차 있을수 있다.
반면 다른 한편의 사람은 가난하게 보이지만 부자를 미워하는 증오와
시기심 혹은 탐욕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외관으로 사람을 판단할수 없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과부와 가난한자를 돌아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이것을 행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들에게
금전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더 좋은 길이 있다.
그것은 곧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땀으로 자신의 빵을 얻을수 있게 하고 더이상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변화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가난이라는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현대세계는 이러한 상황을 바꿀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갖게 됐다.
우리는 이일을 해야 한다"
< 정리=김병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일자).